'패션의 제국'을 쓴 철학자 질 리포베츠키에 따르면 패션은 유혹과 (생산적이고 도구적인) 이성(理性)의 합작품이다. 그는 또 패션이 개인주의와 순응주의의 접점에서 탄생된다고 분석했다. 자신을 드러내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지만 시대 · 사회적 분위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인가,패션은 돌고 돈다. 샤넬이 온 몸을 조이던 코르셋과 페티코트로부터 여성을 해방시키고,이브 생 로랑이 바지 수트로 보다 자유로운 움직임을 부여한 뒤 여성 패션은 계속 반복돼 왔다. 어깨를 좁혔다 넓혔다,스커트 길이를 늘였다 줄였다,허리를 조였다 풀어놨다 하면서.

물론 되풀이된다고 해서 과거와 똑같은 형태로 나타나는 건 아니다. 큰 흐름만 비슷할 뿐 디테일은 끝없이 달라진다. 미국발 금융위기에 따른 세계적 불황이 여성들의 옷차림에 영향을 미친 걸까. '파이낸셜 타임스'는 최근 커리어우먼의 복장에서 캐주얼의 시대는 갔다고 썼다.

금융권을 비롯한 비즈니스계에서 여성들의 옷차림이 정장,그것도 스커트 정장으로 돌아섰다는 것이다. 실제 올 가을겨울 패션계엔 1980년대 초 이후 사라졌던 '파워 숄더 룩'이 떴다. 파워 숄더 룩이란 어깨를 각지게 표현하거나 주름이나 패드로 다소 과장되게 표현하는 형태다.

어깨를 강조함으로써 강하고 자신있는 모습을 연출하는 것이다. 재킷이나 블라우스의 어깨를 부풀리는 건 물론 티셔츠와 원피스에도 어깨 부분에 견장 느낌의 장식을 넣어 두드러지게 만드는 식이다. 여기에 허리와 엉덩이 모두 몸에 딱 맞도록 처리한 펜슬스커트도 부상했다.

이브 생 로랑,막스 마라,조르지오 아르마니,도나 카란 등 세계적인 브랜드 모두 파워 숄더에 잘록한 허리 등 역삼각형 모양의 글래머러스한 실루엣을 강조,섹시하면서도 힘있어 보이는 스타일을 내놨다. 색상 또한 검정과 짙고 옅은 회색 등 차분하게 가라앉은 톤을 중심으로 강렬함을 상징하는 빨강을 가미시켰다.

구두도 로맨틱하기보다 다소 뭉툭하고 남성적 느낌을 강조한 스타일이 많다. 대신 소매에 볼륨을 넣거나 러플과 레이스를 달아 여성성을 살린 블라우스가 대거 등장했다. 단단한 어깨와 고전적 블라우스로 강인하면서도 성숙한 모습을 부각시키려 하는 셈이다. 패션은 시대와 사회의 산물이다. 파워 숄더 룩은 어쩌면 불황으로 어려움에 처한 여성들의 생존전략일지 모른다.

박성희 수석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