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잖아 설악산도 붉은 옷으로 갈아입을 것이다. 가을만 되면 설악산이 떠오르고,한가지 일화가 생각난다. 1994년 10월 직원들과 설악산 대청봉에 올랐다. 1700m나 되는 태백산맥 중 가장 높다는 대청봉까지 오른다는 것은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대단한 각오가 필요했다.

출발 후 서너 시간을 지나 대청봉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궁금했다. 내려오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더 가야 하나요?"라고 묻자 이구동성으로 "조금만 가면 됩니다. 힘내세요"라고 말했다. 몇 시간이 지난 후에도 '조금만 가면 된다'며 똑같은 대답이었다. 모래주머니를 찬 듯 다리가 무거워지면서 한 발도 앞으로 나갈 수 없을 정도로 처지기 시작했다. 그때 누군가 내게 희망의 끈을 내밀었다. 우리 조의 조장인 H군이 내민 배낭끈이었다. "사장님,이 끈을 잡고 따라오시면 덜 힘드실 겁니다"라며 짐이 가득한 배낭을 앞뒤로 메고 온 몸에 땀을 비처럼 흘리며 올라갔다. 힐끔힐끔 나를 뒤돌아보면서 올라가는 속도를 조절하는 H군의 배려에 털썩 주저앉고 싶었던 나는 끝까지 함께 가야 한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H군은 덩치도 크고 체력이 좋았다. 나도 틈나는 대로 운동을 했지만 어디 30대 남자의 체력과 비교가 되겠는가. 경사가 급해지자 휘청거리는 내 두 다리는 의지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때 H군이 내 뒤로 오더니 갑자기 내 허리 밑에 두 손을 떡하니 갖다 대는 것이 아닌가. H군은 뒤에서 받쳐줄테니 중심을 뒤쪽에 두고 천천히 올라가라고 말했다.

'어차피 올라갈 산이니 H군이 하자는 대로 따르자'고 생각하고 무게 중심을 뒤에 두고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힘을 별로 주지 않았는데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며 급경사를 등반했고,마침내 해가 어둑해질 무렵 대청봉 정상에 이를 수 있었다.

정상에서 나를 이끌어 준 H군을 유심히 살펴봤다. 조장으로서 조원들을 챙기고,쓰레기를 처리하고,짐을 정리하는 모습이 사뭇 달랐다. 이후 회사에서 H군이 업무에 임하는 태도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됐고,늘 솔선수범하며 팀을 이끌어가는 그를 신뢰하게 됐다.

기업마다 인재상은 다르겠지만 지나친 창의력과 경쟁력을 강조하다 보면 나만을 생각하고 주변을 둘러보지 않는 경향이 있다. '사람'과 '역량' 중에서 내가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것은 배려의 힘을 믿기 때문이다. 가끔 강의를 나가면 '훌륭한 인재상'에 대한 질문을 받는다. 그럴 때마다 대청봉 오름길에서 타인을 배려하며 팀원을 이끌어 준 한 직원의 아름다운 리더십을 전하곤 한다. 또 대청봉까지 10시간이 넘는 거리를 "30분만,조금만 더"라며 용기의 메시지를 건네 준 산행인들의 아름다운 배려 또한 잊을 수 없다.

김순진 놀부NBG회장 kimsj@nolb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