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게 알('우니')은 숭어의 난소를 소금에 절여 말린 '카라스미' 및 해삼 창자젓('고노와다')과 함께 '일본의 3대 진미'로 꼽히는 귀한 음식이다. 혀에 닿는 순간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리는 부드러운 식감과 바다 내음 가득한 독특한 풍미에 많은 일본인들이 매료된 덕분이다.

일본인들의 성게 알 사랑은 우리의 막연한 예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다. 참치 뱃살,전복 등과 함께 최고급 초밥 재료로 대우하는 것은 기본.심지어 '성게 알 맛 과자'와 성게 알을 말려서 만든 절편이 인기 간식이 됐을 정도다. "전 세계에서 생산된 성게 알의 70~80%는 일본인이 먹어치울 것"(윤일훈 보성무역 대표)이란 얘기는 이래서 나온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일본에서 성게 알은 언제나 공급 부족이다. 일본이 성게를 수입하는 데 열을 올리는 이유다.

보성무역은 성게 알 하나로 일본인의 입맛을 사로잡은 기업이다. 말똥성게와 보라성게의 알을 취급하는 이 회사는 매출의 80% 이상을 일본에서 거둬들이고 있다. 지난해 매출은 58억원.성게 알을 취급하는 국내 기업 중 독보적인 1위다.

이처럼 '성게 알 왕국'을 건설한 창업주 윤명섭 회장(84)은 쉰살이 되기 전까지는 성게와 별다른 인연이 없었다. 전북 부안의 조기잡이 어선 선주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성게를 접한 경험은 흔치 않았다. 첫 사업은 해방 직후 남대문시장에서 시작한 청과물 도매업이었다. 윤 회장은 "지인의 도움으로 우연한 기회에 사업가의 길을 걷게 됐다"며 "신출내기였지만 정직하게 장사한 덕분에 돈벌이는 괜찮았다"고 회고했다.

5년 뒤 윤 회장은 작은 어선을 한 척 구입한 뒤 전남 신안군 임자도로 내려간다. "보다 생산적인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가업이었던 수산업(조기잡이)에 뛰어든 것이었다. 두 번째 사업은 '대박'이었다. 채 10년이 지나기도 전에 배는 6척으로 불어났고 거느리는 뱃사람도 100여명으로 늘었다. 뱃사람들은 매일 밤 술잔을 기울이며 자신들을 친형제처럼 대해주는 윤 회장을 위해 열심히 고기를 낚았다. 덕분에 윤 회장은 '돈명섭'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큰돈을 벌었다. 하지만 과음으로 인해 이즈음 그의 건강은 말이 아니었다.

1970년대 초 윤 회장은 결단을 내린다. "조기잡이 사업을 더 하다간 목숨 부지하기도 힘들겠다"며 배를 모두 처분하고 금광 개발에 뛰어든 것.3년 동안 경북 성주 일대를 헤집었지만 금광은 없었다. 금광을 포기했을 당시 '돈명섭' 수중에는 작은 배 한 척을 살 수 있는 자금만 남았을 뿐이었다. '실패한 사업가'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게 싫었던 그는 임자도 대신 포항을 새 터전 삼아 간재미 잡이를 시작했다.

성게 알과의 인연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일본과 왕래가 잦은 포항에서 수산업에 종사하다 보니 주요 수출품인 성게 알에 자연스레 눈길이 가게 됐다. 마침 이 지역에서 소규모로 성게 알 수출을 해오던 몇몇 사업가들이 동업을 제의해온 터였다. 윤 회장은 "그들은 돈이 있었고 나는 다양한 사업 경험과 유창한 일본어 실력이 있었다"며 "일본인 친척을 둔 덕분에 일본어는 현지인 못지않게 구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윤 회장이 4명의 동업자들과 함께 보성무역을 설립한 건 1977년이었다. 성게 알 가공 작업은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동해안 어촌계에서 성게를 매입한 뒤 껍질 절개→살균→알 채취→세척→물기 제거→포장 과정만 거치면 되기 때문이다. 별다른 진입장벽이 없는 만큼 사업 성패는 일본 바이어를 얼마나 많이 확보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윤 회장의 무기는 이번에도 '신의'였다. 손해가 나더라도 거래처와의 약속은 100% 지켰다. 심지어 일본업체가 성게 알을 너무 많이 주문한 탓에 상당량을 폐기 처분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이에 따른 손실을 보성무역이 지기도 했다.

윤 회장의 신의는 일본 바이어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보성무역은 견본품과 실제 상품에 전혀 차이가 없다","윤명섭이 판매하는 제품은 믿을 수 있다"는 얘기가 돌았다. 까다로운 일본의 위생조건을 통과하기 위해 살균 시설에 대한 투자도 지속적으로 이어갔다.

승승장구하던 보성무역에 위기가 찾아온 때는 설립 10년 만인 1987년.일부 동업자가 보성무역을 빠져나와 똑같은 업종의 회사를 별도로 차린 것.'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敵)'으로 돌변해 윤 회장을 압박했다. 보성무역의 인력을 빼가는가 하면,납품가를 낮추며 거래선을 빼앗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 10년간 윤 회장과 일본 거래업체들이 쌓은 신뢰는 견고했다. 대부분 거래처가 보성무역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버티다 못한 동업자는 사업을 접었고,이 일이 있은 후 보성무역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다.

하지만 시련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1990년대 들어 일본에 불황의 늪이 깊어지면서 고급 식자재인 성게 알에 대한 수요가 차츰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일본 업체들이 한국산보다 저렴한 남미와 러시아의 성게 알을 대거 수입하기 시작한 것도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결정타는 1997년 말 불어닥친 외환위기였다. 가뜩이나 힘겨웠던 국내 성게 알 업계는 초토화됐다. 그나마 재무구조가 건실했던 보성무역 정도만 명맥을 이어나갔을 뿐 한때 20개에 달했던 성게 알 업체 대부분은 이때 문을 닫았다.

외아들 윤일훈 대표(47)에게 아버지가 '러브콜'을 보낸 것도 이 즈음이었다. 미국 일리노이주립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무역업체를 운영하던 윤 대표는 아버지의 부름에 1년간 일본에서 일본어를 공부한 뒤 2000년 보성무역에 합류했다.

입사 후 3년 동안 회사 현황 및 성게 알 업황을 파악하는 데 몰두했던 윤 대표는 돌파구를 내수시장 개척과 신제품 개발에서 찾았다. 윤 대표의 승부수는 적중했다. 내수시장 공략에 나선 지 5년 만에 국내 유명 일식당 200여곳이 차례차례 고객 리스트에 올랐다. 지난해 개발에 성공한 성게 알 통조림은 현재 롯데 현대 갤러리아백화점은 물론 이마트에서도 판매되고 있다.

윤 대표는 "현재 20% 수준인 내수 비중을 5년 내 50% 안팎으로 끌어올릴 계획"이라고 말했다.

포항=오상헌 기자 ohye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