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수석졸업 후 전화국 9급 직원,야간 대학 입학,중·고교 교사,고시학원 강사,31세에 행정고시 합격 후 상공부 관료,그리고 국내 굴지의 대형 식품업체 CEO(최고경영자)에 이르기까지.이 곡절 많은 이력서의 주인공은 박인구 동원F&B 부회장(63)이다.결코 평범치 않은 그의 프로필에서부터 ‘입지전(立志傳)’의 아우라가 풍겨난다.

◆가난한 수재의 설움

그처럼 불우한 학창시절을 보낸 사람도 흔치 않다.‘호남 지역의 경기중’으로 불리는 광주서중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지만,그저 ‘합격의 기쁨’만 잠시 누렸을 뿐이다.정치 지망생이던 부친 대신 어머니 혼자 살림을 꾸려가야 했던 가난한 집안의 8남매 중 장남인 그가 선택한 학교는 학비 전액 면제에 생활비까지 대주겠다는 조선대 부속중학교.부모님을 위해 ‘순종’의 길을 택했지만,몇날 밤이고 베갯잇을 적시는 서러운 눈물 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가난한 수재’의 설움은 고교 졸업 때 극에 달한다.조선대 부고를 수석 졸업한 그가 입학 시험도 보지 않은 채 대학 진학을 포기했으니 그 안타까움이야 오죽했을까.그는 집안의 실질적 가장으로 동생들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전화국 9급(당시 5급) 공무원으로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고교 동창인 김성호 전 보건복지부 장관(서울대 상대·행시 10회)이 전교 차석이었으며,단짝이자 결혼 때 함진아비였던 강병원 동원시스템즈 부회장(서울대 공대) 역시 그보다 고교 석차는 아래였다.

◆끊임없이 도전하는 ‘시험 선수’

맹호부대 파월 장병으로 군복무를 마친 뒤 1971년 조선대 법대 야간학부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낮에는 전화국 경리 직원,밤에는 법대생으로 주경야독을 하던 중 마음 한 켠에 늘 자리잡고 있던 ‘교단의 꿈’이 그를 자극했다.마침 고교 졸업자들도 응시할 수 있는 준교사 자격증 시험이 있다는 것을 알고,대학 2학년 때 응시해 200대 1의 경쟁을 뚫고 전남지역에서 유일하게 합격했다.광주 동신고에서 정치경제 과목 교사로 주경야독을 이어가던 그는 행정고시에 이끌렸다.고교 동창인 김성호 전 장관이 행정고시에 합격하면서였다.

박 부회장은 ‘그때 솔직히 눈에 불이 켜지더라’고 털어놓았다.김 전 장관으로부터 고시 서적을 몽땅 얻어 그 책들로 공부했고,지금까지도 집에 고스란히 보관하고 있다.박 부회장은 1977년 행시 21회에 합격할 때까지 무려 9번의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흡사 ‘토익 시험’을 치르듯 4급(현재 7급) 공무원 시험만도 8개나 붙었다.그러다 보니 한번은 총무처 인사과장이 그를 불러 “너 시험선수냐”고 다그쳤을 정도다.

박 부회장의 당시 치열한 삶을 엿볼 수 있는 한 단면.공립학교인 서울 숭덕중학교 ‘반공도덕’ 교사로 옮긴 그는 퇴근 후에는 고려대 도서관에서 고시 공부를 하고,토요일 밤에는 야간 침대차로 광주에 내려갔다.이어 일요일 하루동안 고시학원에서 경제학과 행정학 강사로 아르바이트를 한 뒤 밤에 야간 침대차로 귀경하는 생활을 2년간 반복했다.당시 그의 하루평균 수면 시간은 3~4시간.그가 학비를 책임졌던 열살 아래 동생인 박희권 외무부 본부대사(전 UN대표부 차석 대사)가 자신의 행시 패스 이듬해에 외무고시에 합격한 것은 큰 보람이었다.박 부회장이 요즘 매주 화요일 점심마다 기타를 배우는 것은 새로운 것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이기도 하지만,한치의 낭만도 없이 부산하기만 했던 청춘에 대한 보상심리도 작용한다고 한다.

◆백화점에 가장 많이 다닌 외교관

박 부회장은 공무원 생활도 ‘수석’으로 시작했다.134명의 행시 21회 합격자 중 연수원 성적 1등을 차지한 것.고시 성적과 합산한 종합 점수에서도 윤용로 기업은행장에 이어 2위를 차지,상위 5명에게만 주는 부서 선택권도 받았다.재무부를 1순위로 꼽던 당시 그는 30세가 넘은 늦깎이인 데다 TK(대구·경북)도 KS(경기고·서울대)도 아닌 자신의 배경을 감안해 상공부를 선택했다.그와 함께 상공부를 택한 고시 동기가 종합점수 4위였던 이재훈 한나라당 인천부평을 당원협의회 위원장(전 지식경제부 제2차관)이다.행시 21회 수석 합격자인 정만원 SK텔레콤 사장 역시 고시 동기다.공무원 시절부터 사회 잘 보기로 소문난 데다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까지 각별한 박 부회장은 동기회 리더로 지금까지 회장을 맡고 있다.

미국 정부의 험프리 장학생에 선발돼 USC에서 공공재정학으로 석사 학위를 딴 그는 미국과 EU 상무관을 7년간 지냈다.미국 상무관 시절 그는 ‘백화점을 가장 많이 다니는 대한민국 외교관’임을 자부할 정도로 거의 매일 백화점을 찾았다.한국 상품의 시장내 평가와 동일 품목 내 외국 브랜드 간의 비교 분석을 위해서였다.그 와중에 자연스레 상품 디스플레이와 디자인 등에 눈을 떠 나름대로 ‘상품학’에 일가견을 갖게 됐다.상무관 시절 활동이 훗날 식품업체 CEO의 준비과정이 된 셈이다.

◆축구 경영학

박 부회장의 손위 처남은 ‘자수성가’로 유명한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사무관 시절부터 김 회장으로부터 기업인의 길을 권유받았던 박 부회장이 이를 받아들인 것은 50세의 나이에 접어든 1996년이었다.당시 산업자원부 부이사관을 끝으로 공직생활을 마감한 뒤 동원그룹에서 가장 여건이 열악했던 동원정밀의 ‘구원투수’로 급파됐다.만성 적자에 부채비율이 600%에 달한 이 회사를 정상화시켜 경영 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뒤이어 동원 그룹주력 회사인 동원F&B 대표를 맡아 이곳 역시 취임 2년만에 흑자 구조로 탈바꿈시켰다.

박 부회장이 경영인으로서 성공할 수 있었던 데는 특유의 성실함과 함께 직원들과의 스킨십 경영을 빼놓을 수 없다.직원들을 ‘이해(understand)’시키기 위해서는 그들 ‘밑(under)에 서야 한다(stand)’는 게 그의 조직관리 철학이다.그 가장 좋은 수단이 축구.매주 토요일 직원들과 축구시합을 하는 것은 그의 중요한 업무중 하나다.거스 히딩크 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과 생년월일(1946년 11월8일)이 똑같아 사주팔자부터 축구 마니아라는 그는 “스피드와 협력 플레이를 통해 예측 불가능한 싸움에서 승리를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축구와 경영은 닮은 꼴”이라고 입버룻처럼 강조한다.

서울 양재동 그의 집무실 한가운데는 특수 제작한 대형 지구본이 떡하니 자리잡고 있다.그가 최근들어 가장 눈여겨 보는 곳은 미국 펜실베니아주 피츠버그시.국내 식품업계 사상 최대 금액인 3억5900만달러를 들여 인수한 미국 최대 참치캔 회사인 스타키스트 본사가 있는 곳이다.국내 식품업체 가운데 해외 수출액이 가장 많은 곳 중 하나인 동원F&B의 글로벌화 발판이 바로 스타키스트다.요즘 지구본을 바라보는 박 부회장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빛난다.

윤성민 기자 smy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