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체가 그 의무를 다했을 때 고통 받는 영혼을 육체로부터 구해내는 것은 올바른 일이다. 예정된 시간까지 기다린다면 자칫 영혼을 구해낼 힘조차 잃어버릴 수도 있다. 노년이 나의 이성을 빼앗고 그것을 조금씩 갉아먹기 시작한다면, 그리고 다만 수족의 조그만 움직임만 남는다면 누구라도 힘없이 무너져 금세 부서져 버릴 것 같은 그 낡은 건물에서 당장 뛰쳐나오지 않겠는가. "

실로 서글픈 이야기다. 이렇게 말한 사람은 로마의 따가운 햇살에는 어울리지 않았던 세네카였다. 세네카는 네로 시대의 굴곡진 인생을 결국 자살로 마감했다. 자신의 논리에 충실했다는 점에서 새삼 그를 기억하게 된다. 이런 말도 있다. "인생의 모든 것에 더 이상 미련과 집착을 갖지 않게 되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용기 있는 눈으로 죽음을 바라보게 된다. 삶에서 멀어지고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더욱 쉽게 생사의 교환을 바라보게 되리라는 희망을 갖게 된다. "(몽테뉴) 이런 가르침으로 따지자면 죽음에 대한 것만큼이나 절박하고 아름다우며 그러나 위선적인 것도 없다. 노년의 감옥에 들어가지 않으려 울부짖으며 저항하다 기어이 끌려가는 사람도 있지만 스스로 죽음을 받아들이며 인생의 마지막 꽃을 피우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많은 죽음들을 통해 잘 알고 있다. 아내의 장례를 치르면서 장구를 치며 즐거워했다는 것은 장자(莊子)의 일화다. 물론 결코 흉내낼 수 없다. 영웅호걸이 주색을 즐긴다는 것이 소인배들의 핑곗거리인 것과 같다. 삶과 죽음은 결코 만날 수 없다는 명제는 철학자들의 재미있는 논리학적 개그다. 그러나 인간은 두 영역의 어느 하나에 속할 뿐이다. 그래서 더욱 집착하게 되고 장엄한 최후를 더욱 비장한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노년의 욕망이 꺼져가는 생명을 더욱 추한 것으로 만들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노추(老醜)라는 말도 생겨났다.

죽음을 마주하는 것도 삶의 한 장면이지만 요즘은 영문도 모른 채 이런 장면들에 직면해야 하는 경우가 잦다. 가족의 품에서 자연인으로서의 삶을 마감하는 일은 아름다운 일이지만 그것을 굳이 국가 공동체의 일로 만들고자 하는 에토스는 전근대성에 다름 아니다. 나라가 개인의 사적 감정을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은 근대 세속국가의 기본 원칙이지만 아직 우리 수준은 여기에도 미달이다.

모든 이가 슬퍼한다는 것과 국가에 의해 슬퍼하도록 규정된다는 것은 전혀 다르다. 자신이 사라져도 세대는 이어지며 미진한 일은 남겨진 세대의 몫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노년의 중요한 덕목이다. 그래서 자신이 늙었다고 생각되면 그때부터는 '입은 닫고 지갑은 열어야' 하는 것이다. 이 말은 특히 언젠가는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노년을 앞둔 우리 모두 기억해두는 것이 좋겠다. 역사적 인물의 죽음이라면 더욱 그렇겠지만 죽음보다 삶의 뒤처리가 언제나 더욱 어려운 법이다. 죽음은 살아있는 자들의 기억도 기어이 과거사로 만들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죽음에 저항하게 된다. 주검을 놓고 투쟁하는 것은 우리들의 인생이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걷는 극한적 경우지만 때로는 데자뷰적 시대착오가 불쑥불쑥 의식을 뚫고 나와 행동으로 표현된다는 점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런 아비투스를 버리지 못하는 그룹이 엄연히 존재한다.

'누구라도 길거리의 긴 줄을 보면 무엇을 하는 줄인 줄도 모르고 일단 줄부터 서고 본다'는 농담은 구 소련에 지적소유권이 있다. 줄이 길수록 더욱 많은 사람들이 따라 선다는 것도 일반 법칙이다. 한국에서는 광장만 보면 주장의 여부에 관계없이 빨간 머리띠부터 매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광장병(病)'이라고 이름 붙인다면 그 지재권은 한국이 갖게 된다. 이제 의례와 시위가 점령한 광장은 반납하고 각자 삶의 공간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이 찬란한 가을은 너무도 짧지 않은가.

논설위원 경제교육연구소장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