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 황제 우즈 꺾고 美 메이저 대회 첫 우승

볼보이로 시작해 가난 딛고 세계 정상 '우뚝'
인생 역풍 뚫고 기적 일군 양용은… "꿈은 이루어진다"
타이거 우즈(미국)의 별명은 '골프 황제'다.

통산 70승에 US오픈 등 메이저대회에서만 14승을 거뒀다.

그와 동반 라운드를 하는 선수들은 주눅이 들어 졸전을 펼치기 일쑤다.

전문가들은 지난주 열린 남자 골프 메이저대회인 PGA챔피언십 3라운드까지 선두에 나선 우즈의 우승을 의심하지 않았다.

실제 그는 3라운드까지 선두로 나선 메이저대회에서 역전불패의 신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바람의 아들' 양용은(37)은 달랐다.

PGA챔피언십 마지막 라운드에서 우즈를 의식하지 않고 자기만의 플레이를 고수했다.

버디 퍼트가 홀에 들어가면 주먹을 불끈 쥐고 환호했다.

그렇게 18홀을 마친 그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기적 같은 승리의 드라마를 쓰며 세계 골프사의 한 획을 그었다.

주요 언론은 PGA챔피언십에서 양용은이 일군 깜짝 우승에 대해 "스포츠 사상 최대 이변의 하나"로 평가하고 있다.

뉴욕 타임스는 "세계랭킹 110위가 1위를 꺾었다"며 "양용은이 타이거 우즈를 기절시키고 골프 세계를 전율하게 만들었다"고 전했다.

⊙ '바람의 아들' 양용은

양용은은 1972년 1월 제주에서 감귤 농사를 하는 가난한 농가에서 3남5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형제가 많았던 데다 농사일도 시원치 않아 늘 배고프고 힘들게 살았다.

고향 제주도의 강한 바닷바람에 이리저리 뒹구는 돌멩이처럼 험난한 인생 역정을 거쳤다.

그는 어려운 집안 사정 때문에 쌍둥이 여동생보다 1년 먼저 학교를 갔다.

학비라도 아낄 생각에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보디빌딩을 했지만 성적은 신통치 않았다.

고등학교 3학년 학생기록부엔 '대학 진학'이 꿈이라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그 꿈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1990년 고교 졸업 후 6개월간 아버지 농사를 돕던 양용은은 생활비라도 벌기 위해 골프 연습장에서 찬밥을 물에 말아 먹으며 볼보이 생활을 시작했다.

아버지 양한준씨는 "골프는 부자나 하는 운동이니 농사나 짓자"고 설득했다.

아버지의 성화에 못이긴 양용은은 건설사에 들어가 굴착기 기술을 배웠지만 무릎을 다쳐 두 달 만에 그만뒀고 나이트클럽 웨이터 등 갖가지 아르바이트로 청춘을 보냈다.

양용은은 "희망이 보이지 않던 시절이었다"고 했지만 궤도를 크게 이탈하지는 않았다.

⊙ 밥벌이로 시작한 골프

해안경비 단기 사병(방위병)으로 군복무를 마친 그는 1991년 제대 후 제주 오라골프장에서 일하면서 골퍼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앤서니 김,대니 리 등 주목받는 골퍼들이 10대 초반부터 골프채를 잡은 것에 비하면 한참 늦은 '늦깎이 골퍼'인 셈이다.

그는 비닐하우스 파이프를 휘두르며 하루 12시간씩 공을 치고 독학으로 스윙을 익혔다.

골프장 내장객들의 스윙을 어깨 넘어로 배운 것이다.

조명시설이 없던 시절이어서 밤부터 새벽녘까지 플래시 하나에 의존해 스윙을 연마했다.

그는 "남들이 공 10박스 칠 때 100박스 칠 정도로 골프가 즐거웠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골프 입문 3년째인 22세 때 투어프로가 되기로 작심하고 뉴질랜드로 건너갔다.

필드 경험을 쌓기 위해서다.

그 결과 1996년 프로테스트에서 결원이 생겨 꿈에 그리던 프로 골퍼가 됐다.

최경주보다 3년 늦은 프로 데뷔였다.

이렇다할 아마추어 경력이 없었던 그를 주목한 사람은 없었다.

골격이 굳어진 19세에 골프채를 잡은 그가 5년 만에 프로에 입문할 수 있었던 것도 웬만한 노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프로가 되던 해 스물한 살이던 우즈는 나이키 및 타이틀리스트와 각각 4000만달러,2000만달러 후원 계약을 맺으며 미 PGA 투어에 정식 데뷔했다.

⊙ 신인왕에서 메이저 챔프까지

프로 선수가 됐지만 그의 삶은 여전히 힘들었다.

1997년 신인왕에 올랐어도 시즌 상금은 590만원에 불과했다.

1999년 박영주씨와 결혼한 뒤 프로 투어 생활만으로는 생계가 어려웠다.

두 아들과 보증금 250만원에 월세 15만원짜리 단칸방 생활을 할 정도였다.

그해 상금 랭킹 9위에 올랐지만 받은 금액은 1800만원이 고작이었다.

'이러다간 가족이 먹고살기도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어 골프를 그만두기로 마음먹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골프에 대한 미련을 접지 못했다.

레슨 코치로 일하면 돈을 벌 수 있는 쉬운 길도 있었다.

투어프로 한 길만 걸어온 양용은은 연습과 대회에만 참가하는 고난의 길을 택했다.

프로 전향 6년째인 2002년 드디어 봄날이 왔다.

SBS최강전에서 생애 첫승을 거두며 이름을 알린 것.

그러나 국내 무대는 그에게 좁았다.

2004년 일본에 진출해 데뷔 연도에 2승을 올렸고,그 뒤에도 2승을 추가했다.

2006년 한국오픈에서 레티프 구센 등을 제치고 우승한 자격으로 출전한 유럽투어 HSBC챔피언스에서 우즈를 제치고 정상에 올라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최경주의 길을 따라 2005년 미 PGA 투어 도전에 나섰다.

퀄리파잉 스쿨(자격시험)을 3수 끝에 통과해 미국 무대에 2008년 데뷔했지만 29개 대회에서 17차례 커트를 통과하지 못하며 상금 순위 157위로 힘들게 딴 시드(출전권)를 잃고 말았다.

서른여섯의 나이에 몰아닥친 역경 앞에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을 만도 하다.

하지만 그는 초심으로 돌아가 더욱 골프에 매진했다.

독학으로 골프를 배웠던 그는 처음으로 미국에서 체계적인 레슨을 받았다.

그립 어드레스 등 골프의 ABC를 다시 익혔다.

골프 인생을 건 마지막 모험이라고 생각하고 아침부터 밤까지 죽을 각오로 스윙 교정에 매달렸다.

다시 퀄리파잉스쿨에 도전해 합격했지만 출전 예정 선수들 가운데 빈자리가 나야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조건부 시드를 받은 것.

지난 1월 소니오픈 때는 하와이까지 날아가 1주일을 기다렸지만 자리가 나지 않아 체재비 2500달러를 날려야 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지난 3월 혼다 클래식에서 첫 우승을 차지했다.

PGA챔피언십에서 마침내 아시아 선수로는 최초로 메이저대회 우승이라는 영예를 안게 됐다.

양용은은 단순하면서도 낙천적이다.

한 홀에서 실수하면 다음 홀에서 잘 하면 되고,오늘 잘 못 치면 내일 잘 칠 거라는 믿음 속에 즐겁게 골프를 친다.

그는 "골프는 열심히 하다보면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게 인생과 참 닮은 것 같다"고 말했다.

김진수 한국경제신문 기자 tru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