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 집중이 낳은 사생아… 세계 각국 부패와의 전쟁중
[Global Issue] 관습과 불법의 경계 넘나드는 중국의 뇌물문화
"로비 대상과 밥을 먹을 때는 식당을 상대방이 지정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밥값이 비싸다고 말하는 건 금물입니다."

중국에서 건설업을 하고 있는 왕씨의 말이다.

그는 처음 사업을 할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이런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상대방이 지정한 식당에서 식사를 하면 대개 1만위안(약 180만원) 정도면 충분할 밥값이 2만~3만위안(360만~540만원)가량 나올 때가 있다.

하지만 왕씨는 불만 없이 식대를 지불한다.

식당이 폭리를 취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식대 중 상당한 액수가 그 식당을 지정한 사람에게 돌아간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다.

돈을 주는 사람이나 받는 이나 이심전심으로 통하는 뇌물 수수의 '기술'이다.

⊙ '홍루'에서 '벤츠'로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가 무엇보다 우선시되는 중국 특유의 관시(關係) 문화는 뇌물이라는 부작용을 키워 왔다.

개혁 · 개방 이후 발전한 건 자본주의 경제가 아니라 뇌물 경제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뇌물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기업들엔 샤오진쿠(小金庫 : 일종의 비자금) 조성이 관습처럼 허용되고, 부정부패를 범하기 쉬운 홍딩상런(紅頂商人 : 정부에 몸담고 있으면서 기업에서 일하는 권력자)이 출세 모델 중 하나로 꼽히는 중국적 시스템에서 뇌물은 필연적 결과물인지도 모른다.

라이창싱은 중국의 전설적 밀수왕이다.

지난 1999년 가족과 함께 캐나다로 도피하기 전까지 담배부터 탱크까지 그가 취급하지 않은 물건이 없었다고 한다.

그의 주요 활동무대였던 푸젠성 샤먼시엔 당시 홍루라는 대형 빌딩이 있었다.

라이창싱이 소유한 이 빌딩엔 식당과 술집, 그리고 여관이 들어서 있었고, 라이창싱은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로비를 위해 이 건물을 세웠다.

고관대작들이 이 빌딩에 수시로 드나들었던 것은 물으나마나다.

당시 푸젠성 성장과 당서기를 역임했던 자칭린 현 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 주석이 라이창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은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최근 그의 귀국설이 돌면서 중국 정가에선 '누구 누구가 다칠 것'이란 루머가 돌고 있기도 하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내놓고 뇌물을 주고받았다.

당시 고위 관리를 만나는 사람은 팔에 롤렉스 시계를 두세 개 차고 나가서 끌러 주고 오기도 했다.

돈가방을 사무실 책상 위에 올려놓고 나오는 것도 흔한 모습이었다.

80년대에 인기를 끌던 말보로 담배는 권력자의 집 주변에선 더 잘 팔렸다고 전해진다.

담배 한 보루를 사서 담배 대신 금괴를 넣어 건네는 게 한때 유행을 타기도 했었다.

하지만 정부의 부정부패 단속이 강화되면서 이처럼 노골적인 뇌물수수 방식은 사라졌다.

대신 뇌물 기술이 발전하면서 보다 은밀해졌다.

벤츠 등 고급 차량이나 별장을 차명으로 넘겨 주는 것은 90년대 이후 일반화됐다.

받은 사람이 그걸 팔든 말든 더 이상 상관하지 않는다.

"만일 소유하고 있다가 문제가 되면 빌렸다고 하면 그뿐"이라고 왕씨는 말했다.

현찰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중국 은행을 이용하면 적발될 가능성이 큰 만큼 홍콩에 차명 계좌를 만들고 그곳에서 현금을 수수하기도 한다.

중국 최대 재벌로 지난해 11월 구금된 황광위 궈메이 회장처럼 공해상의 도박선에서 돈을 대 주고 돈세탁을 해 주는 방법도 종종 사용된다.

요즘 유행하는 것은 유학 스폰서다.

로비 상대방의 아이와 비슷한 또래의 자식이 있어서 룸메이트로 함께 보낸다면 금상첨화다.

성을 이용한 로비도 기승이다.

한때 상하이를 근거지로 한 유력 정치세력인 상하이방의 황태자였다가 2006년 감옥에 간 천량위 전 상하이 당서기도 성 로비를 받았다는 설이 파다했다.

당시 로비를 펼치던 측은 그가 마음에 두고 있는 특정 연예인을 닮은 여인을 백방으로 찾아 상납했다는 소문이다.

진런칭 전 재정부장(장관)과 중국석유화학(시노펙)의 천퉁하이 전 회장도 여자 문제 때문에 2007년 자리에서 쫓겨났다.

⊙ 다국적 기업 수난

이 같은 중국의 폐쇄적 구조에서 살아남으려는 다국적 기업들도 뇌물의 유혹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루슨트 지멘스 등이 관리들에게 뇌물을 줬다가 적발돼 망신당하기도 했다.

월마트는 2003년 윈난성의 한 간부 부인에게 10만위안(1800만원)을 건넨 게 문제가 되기도 했다.

사실 다국적 기업에 중국의 비즈니스 환경은 매우 당혹스러운 면이 있다.

관시를 통하지 않으면 될 것도 안 되는 게 중국이다.

요즘은 많이 달라졌지만 몇 년 전만 해도 차명 회사를 세워 놓고 그곳을 통해 돈을 받는 관리들은 다른 나라에선 찾아 보기 어려운 일이었다.

한 외국계 기업 관계자는 "중국은 국영 기업을 이용한 계획 경제"라며 "시장보다는 정부의 정책이 때론 더 중요하고, 입찰보다는 수의계약이 더 많은 상황에서 관리들과 잘 사귀어 놓아야 한다는 것은 사업의 필수 요건"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기업들이 샤오진쿠를 만들어놓고 로비 자금으로 활용하는 것도 처음에는 이상하게 여겨졌지만 이젠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중국의 회계시스템이 엉망인 것도 따지고 보면 샤오진쿠가 없으면 사업하기 어렵다는 경영자들의 인식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 글로벌 이슈로 떠오른 부패

한편 미국 유럽 등 선진국은 물론 중국 태국 아프리카 등 개도국들도 뇌물 수수 근절에 적극 나서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실적 악화에 직면한 일부 기업들이 뇌물을 통한 시장 지키기에 나서고 있는 것도 각국 정부가 부패 척결을 강화하는 배경이다.

1977년 해외 부패방지법(FCPA)를 제정한 미국은 최근 그 대상을 할리우드 연예산업으로 확대했다.

태국 관광 관리에게 뇌물을 준 혐의를 받고 있는 제작자 제럴드 그린과 그의 아내 패트리셔를 FCPA 위반 혐의로 법정에 세웠다.

제럴드 그린 부부는 방콕 국제영화제 개최 계약을 따내려고 현지 관리들에게 뇌물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리고 있는 그린의 재판은 할리우드 연예산업이 FCPA에 따라 법정에서 심판받는 첫 번째 사례다.

미 정부가 1977년 워터게이트 사건 이후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의 선거 자금을 조사하기 위해 제정한 FCPA는 해외 진출 미국 기업(미 증시 상장 외국기업도 포함)이 해당국 정부 관료나 국영기업 임직원들에게 금품을 제공하는 대가로 사업적 이득을 취하는 것을 막는 게 목적이다.

제공 금지 항목에는 현금뿐 아니라 선물,식사 대접 등도 포함된다.

미 정부의 부패방지 활동 강화로 FCPA 재판은 2003년 3건에 불과했으나 지난해는 17건으로 늘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워터게이트 사건 이후 사실상 수십년간 묵인돼 온 미국 기업들의 해외 비리에 대한 조사가 본격적으로 이뤄지기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미 법무부의 마크 멘델슨 부국장은 단속 대상에 유럽 최대 석유회사 로열더치셸 등을 비롯해 적어도 120여개 기업이 포함돼 있다고 말했다.

영국도 최근 직원들의 부패 책임을 기업들에도 부과하는 새로운 부패방지 법안을 상정하는 등 부패 척결에 힘쓰고 있다.

개도국 역시 마찬가지다.

태국은 최근 부정부패를 목격한 그 누구라도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새 부패방지법안 제정을 추진 중이다.

현행 부패방지법은 부패 관행으로 직접 피해를 입은 당사자만 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제한하고 있다.

부패 행위 적발률을 높이겠다는 의지로 보여진다.

풍부한 자원 덕에 다국적 기업들의 구애를 받고 있는 아프리카도 부패 척결에 힘쓰고 있다.

아프리카개발은행은 지난해 12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공동으로 현지에 맞는 뇌물수수 방지 매뉴얼을 만들어 아프리카 국가에 제공하기로 합의했다.

조귀동 한국경제신문 기자 claymor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