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국회의원들은 당선된 바로 그날부터 4년 후의 공천과 재당선을 생각한다는 말이 있다. 정치인도 '직업의 지속'을 추구하는 건 당연하지만,이에 지나치게 얽매여 공인의 감각과 본분을 소홀히 한다는 뜻이다. 지역구,공천,당론이 국회의원을 의원답지 못하게 만든다는 말이 여의도에서 회자되는데,핵심을 찌르는 지적이다. 심지어 적지 않은 국회의원들이 아예 중앙정치는 접어두고 4년 내내 지역구 관리에만 몰두하는 경우도 있다.

3김의 보스정치가 막을 내리면서,공천 불확실성이 커지자 의원들끼리 사교의 비중이 커지는 여의도 신문화가 형성됐다. 과거에는 보스에게만 인정받으면 공천이 보장되지만,이젠 누가 실권을 쥐게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다다익선으로 보험성 친분을 쌓아두는 것이다.

국회의원들의 이러한 일탈이 국민의 비판을 받고 있지만,수험생이 대입제도에 맞게 진학 전략을 짜듯이 현 제도에 잘 적응하는 합리적인 행동이다. 정치인에게 유권자의 표와 재공천을 의식하지 말고 소신을 가지라는 주문은 마치 기업가에게 이윤을 생각하지 말고 경영을 하라는 말과 같다. 대통령이 8 · 15 경축사에서 선거제도 개편을 제안하면서 정치권의 논의가 본격화될 전망인데,국가적 시야로 접근해 정치인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는 것이 직업의 지속과 성공에도 이익이 되는 쪽으로 개혁 방향을 설정하는 게 포인트가 될 것이다.

국회의원들을 가능한 한 지역구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게 중요하다. 민주주의 제도가 주조된 유럽에서는 오랜 봉건제를 겪으면서 의원의 지역대표성이 중요한 요소였고,한국 또한 농업국가에서 출발한 만큼 이를 무시할 수 없었다.

이제 시대가 바뀌어 지방자치제도가 정착됐고,특히 한국은 도시국가를 논외로 하면 산업화된 국가 중에서 전국 단일 생활권화의 수준이 가장 높다. 이스라엘처럼 전국을 하나의 단일 선거권으로 삼아 결과적으로 모든 의원이 비례대표가 되는 획기적인 방안도 고려해볼 수 있다. 적어도 현재 18%인 비례대표의 비중을 독일수준인 50% 정도로 대폭 확대해,지역구에 매몰되지 않고 국민전체를 위해 일할 의원을 더 늘려서 유권자의 이익을 도모해야 한다. 비례대표의 비율이 낮은 수준으로 유지되면,각 당이 비례대표는 한번만 주는 관례를 채택하고 있어 그동안 비례대표 의원들 다수가 차기 지역구 진출을 목표로 미래의 텃밭을 일구는 데 여념이 없었던 현상을 막을 수가 없다.

비례대표의 비중을 50% 수준으로 끌어올리면,자연스럽게 지역구 수를 줄이면서 현행 소선거구제를 중대선거구제로 바꿀 수 있다. 이때 고질적인 결함으로 남겨져온 농촌과 도시지역 선거구 간 최대 3 대 1의 인구 편차를 줄이는 개혁도 가능할 것이다. 농촌 지역의 인구당 상대적인 의원수 과다문제는 이른바 지역민원사업과 맞물려 한국의 자원배분 형평성을 훼손해왔다.

대통령은 이번에 '너무 잦은 선거'도 지적했는데,해마다 치러지는 선거는 정권의 견제효과를 넘어 여야 모두 선거전략 차원의 정치행위에 관심을 두게 만들어왔다. 현대 대중사회에서 정당들의 유권자에 대한 지나친 아부는 결국 국민의 손해가 되는 경우가 많다. 대통령과 국회의원 임기의 불일치가 근본문제인데,헌법을 고쳐야 한다는 어려움이 따른다. 여야 합의와 국민투표의 필수화 등 개헌이 유독 어려운 상황에서 꼭 필요한 한두 가지만 손댄다는 현실주의적 태도가 요구된다.

선거제도 개편은 예외적으로 플레이어들 스스로 게임의 룰을 정하게 돼,기존 제도에 오랫동안 적응해온 관성과 기득권이 여과 없이 개입된다. 외부인사의 참여가 보완책이 되기는 하지만,결국 입법권은 국회의 고유권한이라 한계가 있다. 정치 소비자인 국민들의 관심과 압력이 반드시 조직돼야 하는 이유이다.

홍진표 시대정신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