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우의 와인이 있는 서재] (24·끝) 와인대통령 소믈리에
국내 대기업의 한 중견 임원이 중요한 손님을 모시고 런던의 유명 레스토랑에서 저녁식사를 하며 겪은 이야기다. 복장,매너 등에서 유독 까다로운 프랑스 레스토랑인 데다 미슐랭 스타 2개를 받은 곳이니 만큼,호스트로서 큰 실수가 없도록 나름 긴장했다. 자리를 잡자 웨이터가 테이블에 앉은 모든 사람들에게 음식 메뉴와 와인 리스트 한 세트씩을 나누어 준다.

순간적으로 그는 당황했다. 두께가 백과사전 절반 수준인 와인 리스트는 물론 주문하는 와인 가격이 모든 사람에게 알려진다는 점도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실제로 호스트 이외의 손님들에게 주어진 메뉴와 와인 리스트에는 단가가 표시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며칠 후에야 알았다. ) 설상가상으로 주문하려고 염두에 두었던 와인의 이름이 리스트에서 보이지 않아 더욱 난감했다.

이때 누군가 주문한 음식에 맞는 와인 몇 가지를 가격대별로 추천해 준다면,성공적인 접대는 물론 레스토랑에 대한 인상도 크게 좋아질 것이다. 이런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바로 소믈리에다. 영어권에서는 와인 책임자(Cellar Master),와인 웨이터 또는 와인 스튜어드(Wine Steward)라고도 부른다. 그들의 임무는 셰프와 긴밀히 협의해 레스토랑에서 서빙하는 음식과 잘 어울리는 와인을 구매해 보관하고 관리하는 것이다. 또한 고객들이 주문한 음식에 어울리는 와인을 추천하고 예의있고 유쾌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시중을 든다.

프랑스어인 소믈리에의 어원은 확실치 않다. 중세의 왕,귀족의 먼 거리 행차에 필요한 식품과 와인을 실은 마차를 '솜'이라 불렀으며,이 마차를 관리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또한 고대 프랑스어인 '짐 나르는 동물'(Bete de Somme)처럼 왕실의 짐을 운반하던 사람들이 식품의 운반과 관리까지 맡은 데서 유래했다고도 한다. 한 가지 공통적인 점은 소믈리에는 왕이나 귀족들이 먹고 마시기 전에 음식이 상하거나 독이 들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수시로 조금씩 먹어 보던 것과 관련이 있다. 오늘날과 같이 전문적인 소믈리에가 등장한 것은 19세기께 파리의 레스토랑과 선술집에서 와인을 전문으로 서비스하는 사람이 출현한 이후이며,세계 최고의 소몰리에 교육기관인 '코트 오브 마스터 소믈리에'(The Court of Master Sommerlier)가 런던에 세워진 것은 1977년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최고 과정을 통과한 사람이 겨우 124명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매우 선별적이다.

한때 미국에서 소믈리에들은 검은 턱시도를 입고 목에는 '테이스트 뱅'(Tastevin)과 손에는 작은 칼이 달린 '코르크 오프너'를 가지고 와인에 대해 조금 안다고 거들먹거리는 사람의 인상이 강했다. 영국에서도 잘난 척하는 중년의 프랑스인 이미지가 있었다. 와인문화 생성 초기 단계인 국내에서는 특급 호텔이나 유명 와인바를 제외하면,와인에 관해 기본적인 지식 정도만 갖춘 젊은 소믈리에들이 대부분으로 질 높은 수준의 서비스를 받기에는 조금 아쉬운 면이 있다.

소믈리에에게 도움을 청할 때는 되도록 원하는 사항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소믈리에들은 월급을 받기도 하지만 와인 판매 수익금에서 일정 비율을 배분받는 경우도 많다. 따라서 너무 막연하게 요청하면 재고가 많거나 마진이 큰 와인을 추천할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고 소믈리에가 추천한 와인을 꼭 선택할 필요는 없다.

하우스와인에 대해 물어보는 것도 우수한 와인을 비싸지 않은 가격에 마실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수준 있는 음식점들은 전반적인 평판을 고려해 하우스와인을 선택하는 데도 많은 신경을 쓴다. 와인은 생산된 지방의 음식 맛을 보완하는 성격이 강하므로 음식 종류에 따라 같은 나라나 지역의 와인을 주문하는 것도 지혜로운 선택이다. 일반적으로 이탈리아 음식에는 이탈리아 와인이 가장 잘 어울리는 식이다. 음식점에서 주문하는 와인의 가격 수준은 한 사람의 풀코스 음식 가격 정도가 적당하지만 우리나라처럼 와인의 마진 체계가 큰 곳에서는 1.5배 정도는 돼야 음식 수준에 맞는 와인을 마실 수 있다.

/와인 칼럼니스트 · 여유공간 대표 sowhatchoi@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