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서재에는 자그마한 대나무 그림 수묵화가 한 점 걸려있다. 우연히 얻게 된 것인데,보기에 담백하고 깊은 맛이 있어서 가끔 쳐다 보며 감상을 하곤 한다. 그림의 사연은 이렇다.

얼마 전 회사에서 누가 필자를 찾아왔다는 연락이 왔다. 그 손님은 용무와 이름을 밝히지 않고 막무가내로 나를 만나야 된다며 회사 입구에서 버티고 있다는 전갈이었다. 잠깐 망설이다 응접실에서 그 손님을 만나보았다. 병색이 완연해 보이는 중년의 아주머니였다. 남편이 작은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얼마 전 부도가 나서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고,그 바람에 화병으로 돌아가시고 자신도 병이 나서 병원에 입원해 있다고 했다. 그런데 막내딸이 지금 고3 졸업반으로 납부금을 낼 방법이 없어 날 찾아왔노라며 30만원만 도와달라는 얘기였다.

내심 당황스러웠으나,자기가 잘아는 사람이 내 이름을 알려주면서 "그 분을 찾아가면 당신을 꼭 도와줄 것"이라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사람의 이름은 절대 밝힐 수 없다고 했다. 난감한 마음에 잠시 침묵이 흐른 후 나는 지갑에서 돈을 모두 꺼냈다. 이십 몇 만원 정도 되는 것 같았다. "그래,누군지 모르지만 내 이름을 알고 절박한 마음으로 찾아왔으니 도와주자"고 맘먹었다. "저는 아주머니가 누구신지 어디 사는지도 모르고 또 물어보지도 않겠습니다. 그러나 저를 믿고 찾아 오셨으니 도와 드리겠다"며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봉투에 넣어 내밀었다.

그 아주머니는 연신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눈물을 글썽거리며 "보답하는 마음으로 이걸 드리겠습니다"라며 신문지로 둘러싼 작은 액자를 내밀었다. 집에 있던 그림인데,내게 준다는 얘기였다. 극구 사양했지만 아주머니는 막무가내로 그림을 내 옆에 두고 다시 한번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조용히 응접실을 나갔다. 그 아주머니가 떠난 후 별 기대 없이 그 포장을 뜯어보았다. 깊이가 있어 보이는 어느 동양화가의 대나무 그림 수묵화였다.

그날 저녁을 먹으면서 어머니께 낮에 있었던 일을 말씀 드렸다. 어머니께서는 "그 아주머니는 아마도 관세음보살의 화신이었을 게다. 그 그림은 관세음보살의 선물이니 잘 간직하고 앞으로도 베푸는 마음을 잊지 말아라"고 하셨다.

시장 한 구석에 손바닥만한 좌판을 놓고 쪼그려 앉아 있는 늙은 할머니와 비 오는 날 지하철 계단에 엎드려 있는 아기 딸린 엄마거지.그리고 우리를 슬프게 하는 모든 것들.우리가 살아가는 둘레 구석구석에는 관세음보살의 화신들이 당신의 베푸는 마음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베푼다 해도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선물은 없다. 그러나 최소한 참된 마음을 가꾸어 갈수 있는 소중한 씨앗은 마음 한구석에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손영기 GS파워 사장(연세대 겸임교수) ykson@gspower.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