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력은 작년 8월 김쌍수 사장(65)이 취임한 이후 모든 사내 보고서가 석 장을 넘지 않는다. '리포트123'이라는 보고문서 작성 원칙 때문이다. 직원들은 문서를 작성할 때 실적은 1장,계획이나 검토는 2장,첨부자료는 3장 이내로 작성한다. 연간 2000건 이상 발생하던 각 사업소의 본사 보고문서도 폐지하거나 통합했다. 이 같은 혁신 활동 결과 보고서 건수가 절반 이상 줄었다.

그깟 종이를 아낀다고 얼마나 절약이 되겠냐고 할 수도 있지만,보고서 줄이기는 김 사장의 경영혁신 마인드를 엿볼 수 있는 단적인 사례다. 그는 놓치기 쉬운 작은 것부터 문제점을 찾아내 하나하나 끊임없이 개선해 나가는 것을 중요시한다. '경영 이삭줍기'로 이름 붙은 이 경영방식은 사소한 비용부터 줄이고 아끼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김 사장은 "작은 것이 모이면 큰 줄기가 되고 그 혜택을 국민에게 되돌려줄 수 있다"고 강조한다. 한전의 첫 민간기업 출신 사장인 그가 첫 번째로 내세우는 혁신 코드다.

◆'쌍칼' 경영

김쌍수 사장은 LG전자 최고경영자(CEO) 시절부터 명확한 일처리를 좋아해 '쌍칼'이란 별명으로 불렸다. 그의 이름과 카리스마를 빗댄 쌍칼의 위력은 한전 사장으로 자리를 옮겨서도 녹슬거나 무뎌지지 않았다.

그는 한전 사장에 취임하자마자 대대적인 조직개편에 착수했다. 취임 6개월 만에 본사 2420명,자회사 3425명 등 총 5845명의 정원 수를 줄였다. 24처89팀이던 본사 조직을 21처70팀으로 줄였다. 회사 내 전 직위에 대한 공개경쟁 보직제도를 실시,팀장급 이상 직원의 40%(438명)를 교체하고 보직 경쟁에서 탈락한 직원은 무보직 발령을 내리는 등 철저한 능력 위주의 인사시스템도 접목시켰다. 공개경쟁 보직제는 민간 CEO 출신인 김쌍수 사장이 청탁,로비,내부 연줄 동원 등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의욕적으로 추진한 핵심 개혁 작업이다.

자산 규모 65조원의 국내 최대 공기업 수장인 그는 한전 앞에 붙은 '공기업'이란 수식어를 언급하기 꺼려한다. 삼성 · 포스코와 같은 기업과 경쟁하며 세계적인 기업이 되기 위해선 임직원들 스스로 공기업이라는 굴레 속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5%는 불가능해도 30%는 가능하다

'기존 것을 허물고 다시 짠다. '이젠 김쌍수 사장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경영혁신 시스템 TDR(Tear Down & Redesign)의 핵심 철학이다. 김쌍수식 '왜 안돼' 경영의 실천프로그램이기도 하다. TDR는 '5%는 불가능해도 30%는 가능하다'는 말에 녹아 있다. 5%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기존 업무의 효율을 높일 생각만 하게 되지만,30%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문제부터 파악하고 모든 것을 새롭게 바꿔야 하기 때문이다.

김 사장이 TDR의 기본틀을 마련한 것은 LG전자 재직 시절이다. 1990년대 LG전자의 주력 사업이었던 백색가전은 위기에 직면했다. 미국 등 선진업체에 밀리고,중국 등 후발업체에 쫓기면서 해외시장에서 설 자리를 잃었다. 당시 창원공장장이었던 김 사장은 GE를 벤치마킹,240m였던 세탁기 생산라인을 40m로 대폭 줄여 생산성을 30% 높이고 중 · 저가 제품 대신 프리미엄 가전을 잇달아 내놓으면서 '백색가전 르네상스'를 실현했다. 이 같은 혁신활동 경험이 TDR의 근간을 이루는 토대가 됐다.

◆CEO가 혁신 최전방에 나서야

김 사장은 늘 고민하는 부지런한 CEO로 불린다. 그는 "CEO의 판단과 결정에 따라 수만명의 행로가 결정된다는 생각을 하면 잠시도 일의 고삐를 늦출 수 없다"며 "다른 생각을 하다가 다시 본궤도로 돌아오려면 시간이 두 배 이상 필요하기 때문에 한눈을 팔 수 없다"고 강조한다. 한전 사장 취임 이후 좋아하던 골프를 끊고 술을 자제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는 경영혁신에 대한 CEO의 역할론에 대해서도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다. 김 사장은 LG전자 재직 시절부터 "혁신은 회사의 문제를 가장 많이 알고 있는 CEO가 직접 나서 '톱 다운'식으로 진행해야 한다"는 지론을 펴왔다. 항상 직원들 앞에 나서 혁신활동을 이끌다보니 가끔은 주변에서 독단적이고 자기 주장이 강하다는 얘기도 듣는다. 하지만 김 사장의 이력을 살펴보면 그의 고집에 금세 고개가 끄덕여진다.

김 사장은 1969년 LG전자에 기술사무직으로 입사,부회장 자리에 오른 2003년 9월까지 35년간 창원공장 현장에서만 보냈다. 당시 현장직원들을 홀대하는 분위기에다 윗사람에게 잘 보이기 어려운 무뚝뚝한 성격과 직선적인 말투로 승진이 번번이 늦어졌지만 그는 우직하게 앞만 보고 나갔다. 이사 직함도 입사 20년차가 돼서야 달았다. 오랜 현장경험에서 오는 자신감과 우직한 성격이야말로 그가 가진 최고의 장점이라고 주변 사람들은 평가한다.

◆혁신 전도사의 마법 통할까

김 사장은 이달 말로 취임 1주년을 맞는다. 이미 한전 사장의 임기 3분의 1을 채운 셈이다. 경직된 공기업에 혁신과 개혁의 바람을 불어넣었다는 점에서는 합격점을 받았지만 아직 그가 풀어야 할 문제는 산재해 있다. 우선 구조조정에만 집착할 뿐 한전의 미래 청사진이 보이지 않는다고 토로하는 일부 직원들의 개혁 피로감을 무마시켜야 하는 임무를 안고 있다.

이에 대해 김 사장은 "경영 효율화를 추진해도 혁신 성과는 빨라도 3~5년을 거쳐 나오는 것"이라며 시간을 두고 경영혁신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해 창사 이래 처음으로 2조8000억원의 적자를 기록한 회사의 경영실적을 개선시키는 일도 당장의 과제다.

이정호 기자 dolp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