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트로피 남편

휴렛 팩커드 회장을 지낸 칼리 피오리나의 남편 프랑크 피오리나는 아내가 매사추세츠 공대(MIT) 경영대학원에 입학하자 두 딸의 양육과 가사를 맡았다. 얼마 후 아내가 루슨트테크놀로지 CEO로 취임하면서부터는 아예 직장을 그만두고 집안일에 전념했다. 명함에는 '칼리 피오리나의 외조자'라는 직함을 새겼다.

맥 휘트먼 전 이베이 CEO의 남편도 아내를 위해 의사직을 그만두고 집안일에 전념했다. 노르웨이 총리와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을 역임한 그로 할렘 브룬틀란의 남편은 한 술 더 뜬다. 대학교수로 일하던 그는 부인이 정계에 진출할 때 이렇게 선언했다. "내가 살림과 아이들을 맡겠지만 내 방식대로 하겠다. "

이런 남성들을 '트로피 남편(Trophy Husband)'이라 부른다. 바쁜 아내 대신 가사를 도맡는 남성들로 '트로피를 받을 만한 남편'이란 뜻이 담겼다. '외조의 왕'쯤 된다고나 할까. 미국 여성 CEO 중 30%가 트로피 남편을 뒀다는 통계도 있다.

집안 일 하는 남편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는 우리나라도 이젠 달라지고 있다. 아내가 밖에 나가 일하고 남편이 가사를 전담하는 부부가 지난해 15만쌍을 넘었다는 통계청의 조사결과만 봐도 그렇다. 지난 5년 사이 무려 42%나 늘었다. 전문직 · 고소득 여성이 많아진데다 가사와 육아가 사회활동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라는 인식이 퍼진 것 등이 원인으로 꼽힌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남성용 기저귀 가방이나 청소기 등 남편을 겨냥한 상품까지 나오고 있다. 아기가 왜 우는지를 알려주는 '아기 울음 분석기'라는 제품도 개발됐다. 신세계 백화점은 여자 화장실에만 있던 기저귀 교환대를 남자 화장실에도 설치했고 한 인터넷 포털사이트의 '살림하는 남편 일기' 카페엔 2300여명의 회원이 정보를 교환하고 있다.

트로피 남편은 경제적으로 무능해 집안에 들어앉은 '셔터맨'과는 좀 다르다. 아내가 밖에서 일하는 편이 더 효과적이라고 판단해 주부 역을 자임한 남편들이다. 전문가들은 바뀐 성 역할에 대해 관용적 시각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가족 각자가 가정에 기여할 수 있는 최선의 역할을 유연한 자세로 받아들일 때가 됐다는 것이다. 남편 입장에선 쌍수를 들어 반길 일은 아니겠지만 무작정 거부할 수도 없을 것 같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 누군가 해야할 가사를 바쁜 아내 대신 맡아달라는 데 무슨 핑계를 대겠는가.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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