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과징금 상위 10社에 한국기업 4곳‥오바마까지 나서 압박
[한국기업 '리걸 트랩' 비상] (1) 카르텔 규제를 뛰어넘어라

"부시 정부가 공정경쟁 관련법의 집행에 관해 지나치게 약한 모습을 보였다. 내가 대통령이 된다면 국제 카르텔을 공격적으로 차단해 나갈 것이다. "(2008년 10월 버락 오바마 민주당 대선후보)

"유럽연합(EU) 경쟁법 집행의 최우선 순위는 카르텔 적발과 제재다. "(2008년 12월 닐리 크로에 EU 경쟁위원회 위원)

"일본 시장에 영향을 미치는 국제 카르텔 사건을 외국과 공조해 적극 처리하겠다. "(2009년 1월 다케시마 가즈히코 일본 공정거래위원장)

주요 선진국 정책 당국자들이 미리 약속이나 한듯이 거칠게 뱉어낸 국제 카르텔 척결 의지다. 글로벌 경제 시대에 맹위를 떨치고 있는 다국적 기업들을 어떤 형태로든 제재해야 한다는 의견은 과거에도 있었지만 올해처럼 카르텔을 정면으로 거론하며 강력한 조사 의지를 보인 적은 없었다. '한번 걸리면 빠져 나올 방법이 없다'는 담합 혐의는 막대한 과징금뿐만 아니라 개인들에 대한 형사 처벌까지 잇따른다는 측면에서 기업들의 공포감은 날로 높아지고 있다.

실제 미국의 변호사들을 위한 인터넷 뉴스통신인 '로(Law)360'은 지난 2월 "미국이 향후 국제 카르텔에 대해 유례없이 강도 높은 제재를 가할 것"이라며 오바마 대통령의 발언을 뒷받침했다. 보도에 따르면 지난 2월 기준으로 미국 법무부(DOJ · Department Of Justice)가 최근 1년간 제재를 가한 주요 타깃은 유럽 및 아시아 업체들이었다.


◆왜 한국 기업이 주 타깃인가

문제는 미국의 역대 과징금 상위 10개 업체 중 한국 기업이 4개나 포함될 정도로 집중포화를 맞고 있다는 점이다. 또 지금까지 한국 기업들이 해외에서 제재받은 8건의 공정경쟁법 위반 중 5건이 미국 정부에 의한 것이었다.

한국 공정위는 두 갈래의 해석을 내놓고 있다. 우선 미국 정부가 한국 기업들,특히 전자업체들이 자국 시장에서 급성장하고 있는 것에 대해 위협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지난해 9월부터 시작된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각국의 실물경제가 침체 중인 상황에서 유독 해외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는 한국 기업들의 활약이 곱게 보일 리 없다는 지적이다. 공정위 관계자는 "적발 건수가 어느 한 나라에 집중되고 있는 것은 집행기관의 의지가 개입된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 또 하나의 해석은 선진국들의 보호무역 강화 추세와 맞물린 것이다. 반덤핑 규제나 미국의 슈퍼301조와 같은 경우 세계무역기구(WTO) 조약에 위배되지만 공정경쟁법만큼은 자국 산업을 보호할 수 있는 좋은 명분이라는 얘기다.


◆강경해지는 해외 경쟁당국

최근 미 법무부가 진행 중인 공정경쟁 위반 관련 수사에서 국제 카르텔 분야는 절반 이상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금액으로는 1997년 이후 미 법무부가 부과한 전체 벌금 약 20억달러 가운데 90% 이상이 기업 간의 담합에 관한 것이었다.

카르텔 위반 행위에 대한 과징금 액수도 지속적으로 늘어나 1996년 2900만달러이던 것이 2008년 한 해 6억9000만달러로 껑충 뛰었다.

EU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EU가 카르텔 사건에 매긴 벌금액은 2002년까지 총 9억4000만유로였지만 이 금액은 EU가 2007년 한 해 동안 부과한 33억유로에 비하면 그야말로 '새발의 피' 수준이다. EU는 뿐만 아니라 2005년 6월 50명의 인원으로 시작한 카르텔국의 직원 수를 2007년과 2009년 각각 20명씩 증원할 정도로 강력한 조사 의지를 보이고 있다. 중국 또한 지난해 8월부터 반독점법 시행을 계기로 역외에서 일어난 담합 사건이라도 자국민에게 영향을 미칠 경우 처벌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해 놓고 있다. 일본이 최근 삼성SDI와 아시아권 지사들 간 거래에 대한 담합 혐의를 조사하고 있는 것도 향후 역외 거래 조사 확대 방침과 맞물린 것으로 주목된다.


◆또 다른 무역장벽 되나?

각국의 공정경쟁법에 따른 외국 기업에 대한 제재가 상대국과의 감정 싸움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국내 업계는 이번에 공정위로부터 2600억원의 과징금을 받은 퀄컴의 경우 미국 IT업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미국 정부가 한국 기업들을 상대로 보복에 나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우려감을 나타내고 있다.

전문가들은 또 주요 국가들이 공정경쟁법을 강도 높게 집행하는 것은 '21세기판 보호무역주의'에 따른 측면도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실제 미국은 1995년 WTO 체제 출범 이후 일방적 무역보복 조치를 금지하자 이에 대응하기 위해 '경쟁법 국제 집행지침'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이는 미국 시장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면 해외에서 일어난 불공정 행위라도 미국 정부가 처벌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외국인이 해외에서 저지른 행위를 처벌한다는 것은 형법의 일반원칙에 어긋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기업들은 미국 정부의 눈치를 살피며 '자발적 동의'라는 이름 아래 처벌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에 따라 공정경쟁법을 도입한 세계 87개국은 1999년부터 궁극적으로 세계 시장에서의 법 기준을 통일시키기 위해 국제경쟁네트워크(ICN) 총회를 매년 열고 있다. 공정위 관계자는 "최근 들어 합병,카르텔과 관련해 국가 간 의견 차이가 상당히 수렴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박신영 기자 nyuso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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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텔=같은 업종에 종사하는 2개 이상의 기업(사업자)이 상품 또는 용역의 가격이나 생산 수량,거래 조건,거래 상대방,판매 지역을 사전 협의를 통해 제한하는 행위를 말한다. 기업들은 이를 통해 신규 업체의 진입을 제한하고 기존 시장에서의 과점적 지위를 강화하고 싶은 유혹에 곧잘 빠진다. 하지만 카르텔로 인해 각국 소비자들이 제품 구매 혹은 서비스를 구입하는 과정에서 피해를 입는 사례가 증가하면서 각국 경쟁당국의 규제 강도도 갈수록 세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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