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일본을 방문한 국내 대형 해운회사의 A사장.일본 화주(貨主)와 만날 때마다 곤혹스런 질문이 나와 진땀을 뺐다. "한국의 상위권 해운사가 줄줄이 기업회생절차(옛 법정관리)를 밟고 있는데 그쪽 회사는 괜찮은 거죠?" 재무제표까지 보여주며 해명을 했지만 찜찜했다.

국내 해운업계가 부실 해운사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다. 부실 해운사가 파산하지 않고 법정관리 등을 통해 '식물기업' 상태로 연명하면서 다른 회사로 부실을 전이시키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어서다. 대부분 채무가 동결되기 때문이다. '강시' 기업이 또 다른 '강시' 기업을 양산하는 셈이다.

해운업은 어음을 사용하지 않아 '부도'라는 개념이 없다. 업계 관계자는 "상수도만 있고 하수도는 없는 꼴"이라며 "몇몇 부실 해운사로 인해 한국의 전체 해운업 위상이 추락하고 있다"고 걱정했다.

◆파산하는 해운사가 없다

작년 상반기까지 해운시장은 유례 없는 호황을 누렸다. 벌크선운임지수(BDI)는 1만1000선을 넘어서며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해운사 입장에서는 굳이 화주들을 쫓아다닐 필요도 없었다. 규모가 작은 해운사에 배만 빌려줘도 이익이 남았다. 빌린 배를 다시 빌려 주는 용선관행이 기승을 부렸다. 그러나 작년 하반기 이후 세계 경기가 꺾이면서 갑자기 해운업에 거품이 빠지기 시작했다. 용선체인에 묶인 해운사들은 도미노처럼 줄줄이 타격을 받았다

지난 17일 기업회생절차를 신청한 TPC코리아가 대표적이다. 지난 3월 업계 7위권인 삼선로직스가 기업회생절차에 들어가면서 삼선로직스로부터 받아야 할 미확정 손해배상채권 450만달러(채권,채무 상계후 금액) 가 묶여 버렸다.

이런 악순환으로 사실상 '채무불이행(디폴트)'을 선언하는 해운회사가 급증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선주협회에 등록된 170여개 해운사 가운데 상위 10개 정도를 빼면 대부분 자력 회생이 어려운 상태"라고 전했다. 그러나 아직 '공식적으로' 파산한 업체는 단 한 곳도 없다. 삼선로직스 대우로지스틱스 TPC코리아 등 세 회사가 기업회생절차를 신청한 것이 고작이다.

◆꽉 막힌 퇴출구

국내 해운업계에는 부실 기업을 솎아내는 장치가 전무(全無)하다. 경고를 울리는 시스템도 없다. 판을 벌여 놓고 수습을 못하는 기업에 대해 민 · 형사상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제도도 미흡하다. 해운사 관계자는 "역사가 긴 선진국들은 부실 책임을 엄격하게 묻는 제도를 갖추고 있다"고 지적했다.

유럽의 경우 일단 회사 유동성에 문제가 생기면 해당 최고경영자(CEO)가 주주총회를 소집해 증자 등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해결책이 나오지 않으면 곧바로 파산절차를 밟는다.

은행 등 선박금융을 담당하는 금융회사의 역량이 선진국에 비해 떨어지는 것도 '좀비' 해운사를 양산하는 요인으로 꼽힌다.

대형 해운사 관계자는 "작년 초 해운시황이 좋을 때는 배값의 90%까지 대출해 주기도 했다"며 "해운업도 리스크 관리 능력이 없는 금융회사 때문에 버블이 커졌다"고 말했다.

안재석/박민제 기자 yag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