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한 '미세스(Mrs.) 심 커피' 한 잔 타 줄까요?"

짧은 숏커트 머리에 붉은 립스틱,자그마한 체구에 단아한 정장….카리스마 넘치는 외모와 달리 목소리는 낭랑하고 경쾌했다. 목소리만 듣고서는 67세라는 나이를 쉽게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다.

김영대 대성 회장을 30년째 보좌하고 있는 수석 비서 전성희 대성 이사.'최장수 · 최고령 비서''명품 비서''비서계의 대모' 등으로 불리는 그가 최근 작은 도전을 했다. 28일까지 서울 인사동 조형갤러리에서 열리는 제1회 예우회전에서 생애 첫 미술 전시회를 가진 것.지난 30년간 하루도 빠짐 없이 반복해 온 아침 6시 출근,저녁 7시 퇴근의 바쁜 일상 속에서 시간을 쪼개 이뤄 낸 결과물이다. 후배들에게 성공의 조건으로 늘 강조해 온 '끊임없는 도전과 자기계발'을 스스로가 지속적으로 실천에 옮기고 있는 것이다.

▼그림 실력이 보통 아닙니다. 동양화는 언제 배우셨나요.

"지난 1년8개월 동안 틈틈이 동양화(수묵담채화)를 배웠어요. 2004년 남편과 사별하고 같이 살던 딸까지 미국으로 떠나면서 적적함을 잊어 보려고 했던 거죠.큰 의미를 두지 않고 배웠던 동양화가 이제는 저의 가장 소중한 친구가 됐어요. 평일에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집에서 새벽 2~3시까지 그림을 그릴 때도 있습니다. 이번엔 공동 전시회였지만 얼마 안 남은 고희(古稀)에는 실력을 더 키워 개인 전시회를 열어 볼까 해요. "

▼30년간 비서라는 한 직무에 몸담을 수 있었던 비결이 궁금합니다.

"자기 도전이죠.꼭 업무 분야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다른 사람과 차별화하려는 꾸준한 노력이 중요합니다. 스스로만이 잘해 낼 수 있다는 자신감도 필요합니다. 커피 한잔을 타더라도 자신만의 방식을 개발하면 더욱 프로페셔널한 모습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

▼명문 약대를 나와 어렵게 딴 약사 면허까지 포기하고 비서를 하게 된 이유는.

"솔직히 말씀드리면 먹고 살기 위해서였습니다(웃음).1979년 하와이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딴 남편(고 심재룡 전 서울대 철학과 교수)이 서울대 교수로 채용됐다는 통보를 받고 부랴부랴 입국했지만 정교수가 아닌 시간강사였어요. 교수 부인의 꿈을 접고 다시 생업에 뛰어들 수밖에 없는 처지였죠.제 나이 37세였습니다.

전공을 살려 세브란스 병원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남편이 대성 상무(현 김영대 회장) 비서직을 권했어요. 남편의 절친한 대학 동기인 김 회장이 마침 기혼자 비서를 찾고 있었어요. 당시 김 회장은 심부름이나 하는 젊고 예쁜 비서가 아니라,오랫동안 일할 수 있는 '동료'를 원했던 겁니다. 공교롭게도 첫 출근이 세브란스 최종 면접날이었습니다. 운명이었을까요. "

▼처음 하는 일이 힘들지는 않으셨나요.
"살림만 했던 두 아이의 엄마였으니 오죽했겠습니까. 매일이 전쟁이었죠.수동식 타이프라이터로 같은 문서를 50장 이상씩 뽑기도 했어요. 비서에 대한 사회적인 편견도 처음에는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더구나 남편의 친한 친구 비서였으니….하지만 김 회장님이 동료로서 세심한 배려를 많이 해 주셨습니다. 명함이나 회사 공문에 제 직함을 비서(secretary)가 아닌 보좌역(assistant)으로 표기하도록 해 주실 정도였어요. "

▼비서 일을 하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은 무엇입니까.

"1989년 대성은 세계적 화학회사인 독일 헨켈사와 의료용 세제 사업분야에 대한 합작 설립을 추진했습니다. 그때 회장님이 회사 대표 협상자로 입사 10년차인 저를 선택해 주셨어요. 약사 면허를 가진 제가 적임자라고 생각하신 겁니다. 당시 서울대 교수였던 남편 인맥을 총동원해서 헨켈사가 요구하는 것을 다 들어 줬습니다. 석 달간의 시장 조사도 완벽하게 해냈고요. 결국 다른 국내 대기업을 물리치고 협상을 성공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 회사가 지금의 대성C&S입니다. 회장님이 저를 대성C&S의 '창사 멤버'라고 부르셔요. 지금 생각해도 개인적으로나 업무적으로 정말 영광스럽고 보람 있는 일이었습니다. "

▼김 회장이 "미세스 심은 1인3역이다"고 자주 말씀한다는데요.
"(웃음)1992년 캐나다 토론토대학에 교환 교수로 가게 된 남편을 따라 3년간 휴직했어요. 떠나기 전에 미국에서 태어난 영어 잘하는 남자 비서 한 명을 후임으로 추천했죠.문제는 그가 한자를 모르는 거였어요. 명함에 있는 한자를 못 읽으니 문제가 많았죠.그래서 한자를 읽을 수 있는 인텔리 여자 비서를 하나 더 뒀답니다. 문제가 또 생겼어요. 대졸인 이 여비서가 커피 타고 청소하는 잔심부름은 못한다고 버틴 겁니다. 그래서 커피 타는 고졸 비서를 따로 뽑았답니다. 1인3역이라는 얘기는 여기서 나온 거예요. "

▼'명품 비서'의 조건은 무엇인가요.

"시키는 일만 해서는 안 됩니다. 그건 적당히 일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이왕 하는 일 100%에 1%를 더해야 합니다. 그래야 프로가 될 수 있습니다. 경영자를 제대로 보좌하기 위해선 단순히 서류를 나르는 원시적인 행동에 머물러서도 안 됩니다. 임원을 비롯해 조직원 전체의 업무를 리드하고 조정하려면 적어도 사내 임원급 정도의 마인드는 스스로 가져야 합니다. 대부분의 비서가 상사를 거스르지 않는 걸 비서의 제1원칙으로 꼽는데 때로는 상사에게 건전한 비판을 하는 야당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전 요즘도 회장님이 임원들을 너무 심하게 나무라시면 '아까 목소리가 너무 크셨어요'라고 살짝 귀띔해 드립니다. "

▼이사님이 타시는 커피가 그렇게 맛있다고 하던데요.

"비서가 커피 타는 것을 싫어하면 안 됩니다. 커피를 타는 것은 집에 온 손님을 정성껏 대접하는 그 이상입니다. 커피를 나르는 것도 회사의 이미지를 나르는 것과 같다고 봐야죠.저는 한번 찾아온 손님에게는 커피에 프림과 설탕을 얼마나 넣는지 일일이 메모합니다. 그 손님이 다시 오면 알아서 커피를 내가는데 손님들도 감탄합니다. 제 커피를 마시러 일부러 찾아오시는 회장님 지인들도 계실 정도예요. (웃음)"

▼30년을 모셨으니 이젠 김 회장의 눈빛도 읽으실 수 있겠습니다.

"물론이죠.목소리만 듣고도 회장님의 세심한 기분 변화를 파악할 정도니까요. 저와 회장님은 업무 파트너 관계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립니다. 밤이든 주말이든 전화만 하면 모든 일을 제쳐 두고 달려갑니다. 회장님 구두 수선도 제 몫이죠.제 일과 회장님의 업무를 따로 따로 구분했다면 이런 일들이 매우 피곤하고 짜증 났을 수도 있겠죠.하지만 회장님과 목표가 같고 서로 생각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주저 없이 궂은 일을 할 수 있는 겁니다. 회장님이 한번은 제게 '내가 평생 예쁜 비서는 못 둬 봤지만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고 하시더군요. 그런 말을 들을 때 참 행복합니다. "

▼국내 최고령 · 최장수 비서인데,언제까지 일을 할 계획인가요.

"이사 직함을 달았으니 정년은 없어요. 회장님께서는 당신이 명예회장 할 때까지 비서를 맡아 달라고 하시는데….물론 김 회장님이 은퇴하실 때까지 제가 모시고 싶습니다. 제 스스로가 생각하는 정년은 70세 정도가 아닐까 해요. 제 스스로의 업무 수행에 만족하지 않는다면 그때 당장 일을 그만둘 겁니다. 그 전까지는 젊은 사람들 못지않게 활기 차고 도전적으로 살고 싶습니다. "

이정호/ 정동헌 기자 dolp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