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오랜만에 만난 지인과 저녁식사를 할 자리가 있었다. 저녁 반주에 흥취가 돋아 한잔 더 하러 가자는 그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런데 옮긴 자리에서 이 사람,갑자기 "손형,우리 그거 한잔 해봅시다. " "그거라니… 뭘." "아,그 빈라덴주(酒) 있잖아요" 하면서 내 말은 들어보지도 않고 바로 제조에 들어갔다.

아! 빈라덴주(酒).

나는 직장생활의 많은 시간을 영업현장에서 보냈다. 한 기업의 CEO가 된 지금도 '영업은 전쟁이다. 승패에는 이유가 없다. 오로지 고지를 점령할 뿐이다'라는 기본적인 생각에 큰 변화가 없다. 온 몸과 마음으로 목표를 위해 투쟁하고 부딪치는 것이 두려워 영업을 기피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나는 영업을 좋아했다. 물론 일이 잘 안 풀릴 때는 괴로워했고,내 자신의 무능함과 분함에 눈물도 흘려봤다.

흔히 영업의 전제조건으로 친화력과 두주불사(斗酒不辭)를 말하지만 난 정반대였다. 일견 발끈하는 까칠한 성깔(?)에 술은 의무방어 수준에 머물렀다. 그럼에도 영업과 술의 관계는 떼려고 해야 뗄 수가 없었으니 술에 얽힌 애환과 일화들이 오죽 했겠는가….

술에 대한 긍정과 부정의 담론이 많지만 나는 긍정 쪽에 가깝다. 그러나 결코 술에 지배당하지 않으려고 했다. 오히려 술을 공부해서 지배하고 이용하려 했다. 지금은 전설로 묻혀가고 있지만,내가 개발한 영업현장용 무기는 그 탁월한 효과로 지금도 후배들이 자주 애용한다. 일명 빈라덴주다. 제조법은 간단하다. 먼저 움푹 파인 접시 위에 맥주잔,그 위에 젓가락을 받치고 앙증맞은 양주잔을 품은 또 하나의 맥주잔,마지막으로 그 머리 위에 양주잔을 얹는다. 그렇게 맥주와 양주로 충만한 삼층탑을 두고 상대방과 마주한다. 첫 잔은 너와 나의 삶을 위해,제일 마시기 힘든 두 번째 잔은 고통을 이겨내고 성공한 우리 일들을 축하하며,세 번째는….허물어져 가는 삼층탑과 함께 우정어린 회유와 협박이 곁들여진다. 네 번째 마지막 잔이 압권(壓卷)이다. 접시에 찰랑찰랑 고여 있는 화합주는 절대 손으로 건드려서는 안 된다. 상대방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담아 머리를 숙여 혀로만 마셔야 한다. 물먹는 강아지 꼴이다. 이쯤 되면 너무나 비참한 현실이 아닐까 하지만 답은 물론 아니다.

빈라덴주가 두어 순배 정도 돌고 나면 우정과 신뢰가 쌓이는 효과를 본다. 그곳에는 결코 간교하거나 이면의 계산 같은 치밀함이 존재하지 않는다. 서로를 순수하게 격려하고 존경하는 것,이것이 빈라덴주의 참맛이다.

그러나,이제 빈라덴주를 버릴 때가 된 것 같다. 빈라덴주의 참뜻이 빛을 발했던 당시 현장과 사람들은 가고,진솔하고 순수했던 사람들의 마음들이 영악해지고 계산적으로 변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마음이 통하는 좋은 친구를 만나면 빈라덴주를 한잔하면서 그 속에 담긴 추억과 의미들을 즐겨보고 싶다.

손영기 GS파워사장 ykson@gspower.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