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정확하게 8번 사표를 냈어요. 회사에 붙어있다가는 급사밖에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허허."

한봉근 대표는 아버지 한복린 회장과 '주파수'가 다르다고 스스럼 없이 말한다. 물론 둘은 그 얘기가 나올 때마다 마주보고 웃는다. 부대꼈지만,후회 없을 만큼 치열하게 싸우며 대안을 찾았고,할 역할을 다했다는 얘기다.

아버지 한 회장은 극도의 원칙주의자였다. 생활신조도 근검절약.타고난 사업감각을 빼고는 한마디로 '범생'이다.

"한 달 용돈이 5만원입니다. 골프도 사우나도 외식도 안하세요. "

자식들에게도 마찬가지."임원 때인데 하루는 카드값 90만원이 없어서 아버지한테 빌렸는데,사장 진급 때 퇴직금에서 빼시더라고요. "

짠 경영을 했지만 한 회장은 모은 재산이 없다. 창업 이후 벌어들인 돈의 절반은 회사에 재투자하고,나머지는 직원 월급과 사회봉사에 모두 써버렸기 때문이다. 배당도 받지 않았다. 한 대표 역시 대출을 받아 구입한 아파트 한 채가 재산의 전부다.

"고생하고 사회에 기여한 만큼 쓰고 누리실 만도 한데,너무 원리원칙에 철저하셔서 답답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

부동산 투자가 절정을 이루던 1970~80년대의 일이다. 아버지한테 공장부지용으로 땅 몇 군데를 봐둔 게 있다고 운을 뗐다가 한 대표는 불벼락을 맞았다. "장사꾼이 땅에 관심갖다니 정신이 있느냐"는 이유였다. 그때 바득바득 우겨 경기도 파주 땅을 사두지 않았더라면 지금 제2공장은 없었을 것이라는 게 한 대표의 말이다.

한 대표는 스스로를 자유인이라 부른다. 미대 출신(서울산업대 도예과)인 그는 미국 덴버대 MBA를 마친 뒤 아르바이트로 번 돈으로 세계 일주를 떠났던 여행 마니아이기도 하다. 회사생활은 갑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찾은 돌파구가 해외 영업.여행이 취미인 그와 비즈니스 해외 출장은 기가 막히게 궁합이 잘 맞았다.

그는 요즘 회사의 글로벌화에 모든 에너지를 쏟고 있다. 해외영업팀을 신설했고,미국사무소도 개설했다. 그는 "현재 20%인 수출 비중을 5년 내 50% 이상으로 끌어올릴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미국시장에서 유럽산을 제치고 판매량 1위에 올라서겠다는 게 한 대표의 목표다.

그는 5년 내 세계적인 미술건물을 짓고 싶다는 꿈을 갖고 있다. "미술재료 박물관과 돈 없는 젊은 작가들을 위한 무료 전시장,작업실 등을 마련해줄 거예요. 예술이 살아야 사람살이가 행복해지기 때문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