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의 혼란은 2등,3등 기업엔 '도약을 위한 기회'의 다른 말일 뿐이다. 기존의 판을 깨뜨릴 수 있는 기회를 얻기 때문이다. 도요타는 1970년대 1차 오일쇼크의 혼란 속에서 고연비 · 고품질을 무기로 글로벌 일류 기업의 터전을 닦았다. 구글은 1990년대 정보기술(IT) 경기 호황기가 아니라 거품이 꺼져가던 2000년대 들어 글로벌 최고 인터넷 기업으로 부상했다.

지금 전 세계 자동차 산업계에 또다른 지각변동의 회오리가 몰아닥치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에 이은 실물경기 침체로 1,2위를 다투던 도요타가 휘청이고,미국 GM이 몰락하는 사이 독일 폭스바겐그룹이 약진하고 있다. 연비좋은 소형차를 앞세운 현대 · 기아자동차 못지않게 주목의 대상이다.

스포츠카 회사인 포르쉐와 합병을 추진 중인 폭스바겐그룹은 폭스바겐과 아우디,벤틀리,스코다,세아트,스카니아,람보르기니 등 9개 브랜드를 거느린 유럽 최대 메이커로 지난 1분기 글로벌 판매에서 GM을 제치고 2위로 올라섰다.

그동안 고전을 면치 못했던 미국 시장 점유율은 지난해 2.2%에서 올 상반기 2.8%로 상승했다. 한국시장에서도 전년 상반기에 비해 52%나 많이 팔았다. 2018년까지 전 세계 판매 1100만대를 달성,도요타를 넘어 1위로 올라선다는 계획이다.



하나를 개발해 여러번 쓴다

폭스바겐은 자동차의 기본 뼈대인 플랫폼 수 축소에서 어떤 경쟁사보다 앞서간 회사다. 1990년대 초반 16개이던 플랫폼 수를 6개로 줄였다. 앞으론 4개로 축소할 계획이다. 폭스바겐 아우디 스코다 등 계열 브랜드 차량을 같은 플랫폼으로 제작해 신차 개발비용을 줄이고 개발기간도 단축하기 위해서다. 한 예로 대형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들인 폭스바겐 투아렉과 아우디 Q7,포르쉐 카이엔은 같은 플랫폼을 사용하고 있다. 쌍둥이 차라는 얘기다.

폭스바겐은 한발 나아가 변형 모델들도 쏟아내고 있다. 계열 브랜드들이 하나의 플랫폼을 공유하는 것을 넘어 같은 차를 약간 변형한 모델을 도입해 또한번 재활용하고 있다. 베스트셀링카인 골프의 경우 기본형 모델 외에 골프왜건 골프밴 골프픽업 등 파생모델을 만들어 판매를 늘리는 방식이다. 이 덕분에 골프 플랫폼인 MQB는 폭스바겐 폴로와 골프,투란은 물론 아우디 A1,스코다 파비아 등에 사용된다. 이 플랫폼에서 생산되는 자동차가 연간 200만대를 넘는다.

뛰어난 노동유연성도 경쟁력의 핵심이다. 폭스바겐은 독일 통일 특수가 끝난 1990년대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렇지만 고용을 보장하는 대신 임금을 삭감하는 데 노사가 합의해 위기를 거뜬히 넘겼다. 이 같은 타협정신은 위기 때마다 힘을 발휘하고 있다.

남들이 무관심할 때 선점한다

폭스바겐은 신흥시장의 강자로 통한다. 시장이 지금처럼 커지기 전 남보다 한발 앞서 브라질,중국 등에 진출해 큰 성공을 일궜다. 브라질엔 1953년,중국엔 1985년 생산거점을 세웠다. GM 도요타 등이 눈여겨 보지 않을 때다. 인도엔 1999년,러시아엔 2006년 양산공장을 지었다. 지금 이들 시장 모두에서 폭스바겐은 점유율 1,2위를 다투고 있다.

글로벌 거점별 판매모델의 현지생산 비중이 평균 95%로 다른 메이커에 비해 상당히 높다는 점도 강점이다. 현지생산 비중이 높다는 것은 현지수요 특성을 제때 반영할 수 있고 수출선적 최소화를 통한 비용절감,환율 변동에 따른 리스크를 줄인다는 장점을 안고 있다. 그만큼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는 얘기다.

폭스바겐은 1976년 진출했다가 1988년 철수한 미국에도 다시 진출한다. 테네시주 차타누가에 짓고 있는 공장은 2011년 준공 예정으로 연간 15만대 생산능력을 갖추게 된다. GM 등 미 빅3 자동차 회사들은 물론 도요타 등 일본 메이커들이 공장 문을 닫고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역으로 공격적 투자를 결정했다. 지금이 미 시장을 잡을 절호의 기회라는 판단에서다.

연구개발 5% 룰을 고수한다

폭스바겐그룹에는 '5% 룰'이란 게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매출의 5% 이상은 반드시 연구개발(R&D)에 투자한다는 원칙이다. 불황이 엄습한 지난해에도 폭스바겐그룹은 매출의 5.5%에 달하는 62억유로(10조5000억원)를 R&D 투자에 쏟아 부었다. 이 같은 R&D 투자는 시장수요에 부응하는 다양한 신모델 출시로 이어져 위기 상황을 한결 쉽게 헤쳐가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폭스바겐그룹 계열 9개 브랜드가 지난해 글로벌 불황 속에서 내놓은 신모델만 52종에 달한다.

아울러 폭스바겐은 친환경차 기술 개발에서도 하이브리드카의 도요타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적극적이다. 1980년대에 앞선 디젤기술을 내세워 친환경 브랜드인 브루모션을 만들었다. 아우디와 세아트도 각각 e컨셉트와 그린라인 등의 그린카 브랜드를 한발 앞서 도입했다. 이 같은 오랜 연구개발 노력은 폭스바겐의 브랜드 로열티를 지탱해 주는 밑바탕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수언 기자 soo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