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머와 진실

김회은 <텍사스A&M대 교수>
[인문학 산책] “~카더라” 소문이 만들어 낸 광기의 역사
묀치제 호수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이 옷깃을 단단히 여미게 했던 1900년 3월13일.

살얼음이 낀 호숫가에서 발견된 꾸러미 하나가 베를린에서 북동쪽으로 약 370㎞ 떨어진 인구 1만명의 소도시 코니츠 주민들의 마음까지 차갑게 얼어붙도록 만들었다.

꾸러미 안에서 발견된 것은 빳빳한 포장지 안에 단단한 노끈으로 꽁꽁 동여매진,팔 다리와 머리가 잘려 나간 사체(死體).

이틀 전인 3월11일 일요일 오후에 사라졌던 18세 고등학생 에른스트 빈터가 싸늘한 주검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끔찍하지만 단순한 살인 사건으로 끝날 수도 있었던 이 날의 발견은 그러나 몇 가지 정황이 우연히 겹치면서 인간의 유쾌하지 못한 단면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역사에 기록된다.

피를 고의적으로 빼낸 것처럼 사체에 피가 하나도 없었다는 점,목이 잘려서 살해된 것 같다는 부검 소견,살해된 시점이 부활절에 가까웠다는 점,거기다 가장 결정적으로 시신을 분해한 칼놀림이 마치 외과 의사나 푸줏간 주인이 한 것처럼 예사롭지 않았다는 사실이 모두 결합되면서 코니츠 주민들 사이에는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유대인이자 푸줏간 주인이었던 57세의 아돌프 레비가 유대교 제사 의식을 행하면서 소년을 제물로 삼아 살해했다는 것이었다.

'유대인 제례살해(ritual murder)'라는 전설은 부활절 즈음 유대인들이 기독교도 소년을 납치해 거꾸로 매달아 고문한 후 목을 따서 피를 받고 그 피로 누룩 없는 빵을 만들어 먹는다는 상상 속의 이야기로 12세기 중반 유럽에서 처음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코니츠 사건의 중요성은 이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20세기 초반 독일에서도 여전히 실질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코니츠에 있던 두 명의 푸줏간 주인 중 한 명이었던 레비는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고 살해 동기가 없었음에도 칼을 쓸 수 있는 유대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르게 된다.

반면 빈터와 비밀리에 교제 중이던 안나 호프만의 아버지인 또 다른 푸줏간 주인 구스타프 호프만은 기독교 신자이자 도시의 유지였다는 이유로 수사망을 피해 갔다.

자신들의 생각만큼 신속하게 수사가 진행되지 않자 수천 명의 코니츠 주민들은 5월 말에 거리로 뛰쳐 나와 300명 남짓했던 코니츠 거주 유대인의 사업장과 주택,회당에 돌을 던지고 불을 지르며 레비의 구속과 처벌을 강력하게 요구한다.

수주간 지속됐던 시위는 결국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챈 황제 빌헬름 2세가 650명 남짓한 대대 병력을 파견,시위를 강제로 진압한 6월13일이 되어서야 끝나게 된다.

코니츠의 주민들은 왜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에 목숨을 걸고 시위를 하였을까.

비이성적으로 보이는 유대인에 대한 편견은 어떤 과정을 거쳐 살아 있는 강력한 무기로 변모하게 되었을까.

3월 중순부터 6월까지 이 작은 도시에서 발생한 일련의 사건은 한 사회에서 편견과 증오가 어떤 방식으로 확대,재생산되는가를 우리에게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창이 된다.

우선 코니츠가 종교적,인종적,계급적 갈등을 겪고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레비가 주범이고 다른 유대인들은 공범이라고 사건 발생 초기부터 강력하게 주장했던 이들은 경제적으로 중산층에 속했던 유대인 가정에서 허드렛일을 돕던 가정부나 일용직 노동자들이었다.

경제적으로 약자였던 이들은 종교적,인종적으로 주변인이었던 유대인들을 타깃으로 삼아 개인적인 복수를 행하고자 했던 것이다.

400건에 이르는 경찰 제보의 대부분이 유대인 가정에서 일하던 하녀들에게서 나왔다는 것은 이를 뒷받침한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피가 필요해'라고 말하는 것을 작년에 들었어요" "지하실에서 톱으로 써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어요" 수준의 구체성이 떨어지는 제보를 정교화한 것은 '카더라'라는 소문을 자신들의 정치적인 이해관계에 맞춰 재단하고 각색해 낸 언론들이었다.

이 사건을 구체적으로 연구한 미국의 역사학자 헬무트 스미스에 따르면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 코니츠의 식당,술집,여관 등 사람들이 모일 만한 곳이면 어디나 기자들이 상주해 있으면서 토막 살인에 대한 것은 어떤 것이든 받아 적어 보도했다고 한다.

사실과 허구를 절묘하게 조합하기로 유명한 독일의 대표적인 반유대주의 신문 슈타츠뷔르거차이퉁의 편집장이었던 빌헬름 브룬이 대표적인 인물로,그의 펜 아래서는 '동네 바보'라고 불리던 이들의 지나가는 말도 '이 사건에 정통한 관계자'의 따끈한 소식으로 변신해 갔다.

이렇듯 언론이 부채질한 반유대주의 열풍이 유대인 학살이라는 파국으로까지 번지지 않은 것은 상식을 존중하는 정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사건 초기 일반 노동자의 10년치 월급에 해당하는 2만마르크나 되는 거액의 포상금을 내걸어 사건에 대한 관심을 지나치게 끌어올린 실수를 저지르긴 했지만,독일 정부는 유대인도 독일 국민이라는 원칙하에 유대인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고자 최선을 다했다.

불과 40년 후 나치 정부가 유대인은 독일 국민의 적이라고 규정했을 때 유대인 대학살이 발생했던 점을 기억한다면 소문과 광기에 휩쓸리지 않는 상식을 지키는 정부가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점을 새삼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에른스트 빈터를 살해한 범인은 끝내 잡히지 않고 사건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게 된다.

그러나 근거 없는 소문이 다양한 사회적,정치적 이해관계와 만나서 비극을 만들어 낸 1923년 관동 대지진 한국인 학살사건이나 최근의 위구르 · 한족 사태를 보면 코니츠 토막살해 사건은 우리에게 사회적 관용과 언론의 책임의식,상식을 지키는 국가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새삼스레 일깨워 주는 역사의 단막극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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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글생글은 이번호부터 한국경제신문 매주 토요일자에 실리고 있는 기획 연재물 '인문학 산책'을 전제합니다.

'인문학 산책'은 국내외 유명 대학 교수들이 역사 철학 문학 예술 등 인문학적 관점에서 우리 사회의 주요 이슈와 현상을 분석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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