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 박영석씨는 웬만해선 물건을 들고 다니지 않는다고 한다. 심한 건망증 때문이다. 지금까지 잃어버린 휴대전화만 100여대다. 때론 집 전화번호도 생각나지 않을 정도다. 16년 전 에베레스트(8848m) 무산소 등반의 후유증이다. 한 번 등반을 하면 몸무게가 15㎏씩 빠질 만큼 혹독한 상황에 놓이니 그럴 만도 하다.

목숨을 잃을 뻔한 위기를 넘긴 것도 수십 차례다. 1997년엔 다울라기리(8201m)의 크레바스(빙하속 낭떠러지) 아래로 추락하다가 스노브리지에 배낭이 걸려 살아났다. 1995년엔 에베레스트에서 눈사태를 만나 700m나 휩쓸려가기도 했다. 다른 산악인들도 대부분 비슷한 경험을 갖고 있다. 고산 등반에 성공하려면 강한 체력과 의지,등반기술을 갖춰야 하는 것은 물론 운도 따라야 한다는 의미다.

해발 7500m 이상에서 인체는 한계를 느낀다. 산소가 크게 줄어들면서 두통 구토 호흡곤란 시력저하 등의 증세를 보이는 고산병에 노출되는 탓이다. 요즘은 장비와 식량이 개선되고 등반 루트에 대한 정보가 축적돼 여건이 좀 나아졌다. 그래서 어떤 루트를 언제 어떤 방법으로 올랐느냐를 따진다. 산소통이나 셰르파 도움을 받지 않는 무산소 단독등반,새로운 루트 개척,우회보다 직선 등정을 높게 평가한다. 자연의 불확실성에 온몸으로 맞서야 하는 상황속으로 던져지는 셈이다.

8000m가 넘는 거봉 14좌(座)를 모두 오른 첫 산악인은 이탈리아의 라인홀트 메스너다. 그 때가 1986년.지금까지 14좌 완등자로 인정받은 사람은 박영석 엄홍길씨를 포함해 15명에 불과하다. 여성으로는 오은선(12좌 등정) 고미영(11좌)씨가 첫 14좌 완등에 도전중이었다. 그러다가 지난 11일 고씨가 추락사해 안타까움을 주고 있다. 낭가파르바트(8126m) 정상을 밟은 후 하산하던중 '칼날능선'에서 난기류에 휘말려 협곡으로 떨어졌다고 한다.

고산 등반에는 늘 죽음이 따라다니지만 그게 산악인들이 산을 찾는 이유이기도 하다. 메스너는 체력이 한계에 달해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절대위험속에서 고양감을 느끼고 새로운 자신을 보게 된다고 했다. 그는 이를 '하얀 고독'이라고 불렀다. 고씨도 사투를 벌이며 하얀 고독을 경험했을 게다. 고산등반만큼 처절하진 않겠지만 우리의 삶에서도 희망과 절망은 반복된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혼신을 다해 극한까지 버텨나가는 자세를 가져야 할 일이다.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