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음료수 통조림 등 스틸 캔 제품을 만드는 원재료를 석도강판이라 한다. 식음료 금속 포장재라는 특성상 인체에 무해한 '주석'으로 표면 처리했다는 점에서 '주석도금 강판'으로 일컬어진다.

오는 16일 창립 50주년을 맞는 동양석판(회장 손봉락)은 국내 처음으로 주석도금 강판을 국산화했다. 지금까지 생산한 석도강판이 600만t을 넘는다. 일반 음료 캔(180㎖ · 무게 30g) 2000억개를 만들 수 있는 물량이다. 국내 시장 점유율 40%의 1위 기업으로 캔을 만드는 한일제관 롯데알미늄 삼광유리 등 10여개 국내 기업 및 미국 유럽 일본 등 30여개국에 수출하고 있다. 지난해 매출은 4076억원.

경북 영주에서 태어난 우석 손열호 명예회장(88)은 17세 때 양조장을 하던 부친의 갑작스런 작고로 사업가의 길을 걷는다. 1940년 초 대구에서 중고 발동기를 모아 일본에 되파는 일을 하면서 번 돈으로 농기구 수리 및 매매업을 시작했다. 이후 연마석으로 농업용 숫돌과 보리 찧는 롤러를 만드는 삼양연마를 인수,경영하면서 큰돈을 모았다. 그는 "당시 미국 독일 프랑스 등 해외 공장을 견학하면서 연마석이 있어야만 쇠를 깎아 기계공업이 발전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게 됐다"고 회고했다. 이것이 제조업 외길의 밑바탕이 된 것.그는 대구에서 한때 연탄 사업도 했는데 이때 고(故) 김수근 대성그룹 회장,고 정인욱 강원산업그룹 명예회장 등과 친분을 쌓았다.

손 명예회장은 1959년 지인으로부터 서울 영등포에 깡통 원판 도금 공장이 매물로 나왔는데 매입할 의향이 없느냐는 제안을 받고 인수,동양석판을 설립했다. 이 공장 운영자는 이미 기계까지 해외에 발주해 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석판 사업의 시작은 순탄치 않았다. 기술자가 없어서였다. 수소문 끝에 사람들을 모아 기계 가동에 들어갔지만 석판이 생산되지 않았던 것."알고 보니 해외에서 들여온 기계는 깡통이 아닌 자동차부품 도금용이었어요. 석판을 몰랐던 사람들이 잘못 사온 것입니다. "(손 명예회장)

이 같은 난관을 돌파하려면 석판 제조기술을 익혀야만 했다. 손 명예회장은 1961년 직접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의 동양강판(東洋鋼鈑)과 협의 끝에 열지식 도금기계(주석을 끓여 철판을 통과시키면서 도금)를 도입했다. 그는 "새 기계를 들여왔지만 석판 제조기술을 몰라 생산을 못했다"며 "2년여에 걸쳐 전 직원이 일본산 통조림 캔의 재질을 분석하고 일본을 드나들며 기술을 익혀 1962년 9월 국내 처음으로 석판을 만들게 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였다. 제품이 팔리지 않았던 것.손 명예회장은 을지로 철물상에 나가 보고 가게마다 수입품이 가득 쌓여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는 곧바로 정부 관계 부처(당시 부흥부)를 찾아가 "국가가 기술 개발을 독려한다면서 왜 수입을 허용하느냐"며 끈질기게 진정을 넣었다. 이 같은 노력으로 외국산 석도강판이 수입 불가 품목으로 지정될 수 있었다.

이후 수요가 늘면서 도금기계 2호기를 도입했으며 3,4호기는 자체 기술력으로 개발했다. 특히 1964년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한국군을 대상으로 한 군용 시레이션 통조림의 수요가 넘쳐났다. 동양석판은 국내 유일의 석판 공급업체로서 특수를 누렸다. 이때부터 매년 30~40%씩 성장세를 이어가며 1979년까지 국내 시장을 독점했다.

이런 가운데 당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국내 산업이 급성장하면서 생산성이 보다 높은 전기식 도금기계가 필요했다. 일본에서 기계를 사와 설치만 해도 돈을 버는 데는 문제가 없었지만 손 명예회장은 외국 기술 의존에서 벗어나기 위해 직접 제조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기존의 열지식 도금기를 직접 만든 경험을 활용하기로 했다. 직원들을 일본에 보내 어깨 너머로 기술을 습득하고 들은 이야기를 일주일 단위로 국내에 보고토록 하면서 국산화를 추진한 것.마침내 1967년 전기주석 도금강판 라인의 설계,설비(국산 60% · 일본산 40%),조립,설치까지 우리 기술로 이뤄 냈다.

1977년 포항제철이 석도용 원판 생산을 시작하자 동양석판은 일본에서 전량 수입하던 원료의 안정적인 확보를 위해 포항으로 공장을 옮겼다. 1978년 포철 고로2호 준공식에 참석했던 고 박정희 대통령이 박태준 전 회장의 천거로 회사를 방문하기도 했다. 1979년 오일 쇼크가 터지면서 원자재 값이 급등,국내 기업들의 상황이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여기에 일신제강(현 동부제철 전신)이 석판을 생산하면서 시장 경쟁도 치열해졌다.

당시 원자재 파동으로 원재료 조달이 어렵게 되면서 손 명예회장은 영국을 방문해 효성물산 런던지점에 근무하던 장남 손봉락 회장(59)과 함께 원판 구매처를 물색했다. 이를 계기로 1979년 손 회장이 무역부 차장으로 입사,가업을 잇는다. 이때 동양석판은 해외 진출에 나선다. 1989년 태국에 석도강판 플랜트 설비를 첫 수출하고 이어 1994년 미국 중국에 잇따라 합작 투자 공장을 지어 지금도 운영하고 있다. 1992년 손 회장의 동생 준원씨(부회장 · 47)도 무역부 차장으로 입사하게 된다.

동양석판은 기계 재도입 등 창립 초기 3년간을 제외하고는 줄곧 흑자 경영을 해 오고 있다. 외환위기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 구조조정이나 노사 분규가 한 번도 없을 정도로 노사 화합을 이뤄 오고 있다. 직원들 근속 연수는 평균 16년을 넘는다. 손 회장은 "아버님은 회사가 어려워 일감이 없을 때에는 직원들에게 풀을 뽑도록 하면서까지 급여를 한 번도 늦춘 적이 없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손 회장은 "석도강판의 플랜트 수출은 경영을 맡은 2세로서 이뤄야 할 아버지의 숙원사업 가운데 하나였다"며 "석도강판 외길로 다져진 '내공'을 국내가 아닌 해외에서 검증받아 지속가능 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한 출발점이었다"고 설명했다.

김후진 기자 j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