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은 허구인가,실재인가
[강영준 선생님의 소설이야기] 39. 한강「내 여자의 열매」
⊙ 현실을 교란하는 실재계

영화 「매트릭스」시리즈의 핵심적인 설정은 인류가 살아가는 실재 세계는 황량하고 음산한 폐허일 뿐이며 우리가 현실로 받아들이는 세계는 실은 컴퓨터의 가상 화면 같은 허구라는 것이다.

이러한 설정은 단순히 영화적 즐거움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실은 꽤 복잡하고 까다롭게 해석할 여지도 있다.

인류는 언어로 사유하고 언어로 대상을 인식하며 언어로 의사소통한다.

어떻게 보면 인류가 살아가는 세계는 언어에 의해서 구조화된 체계이며 그런 까닭에 언어와 그에 해당하는 개념은 세계를 낱낱이 재현한다고 할 수 있다.

정신분석자들이 현실을 '상징계'라고 규정짓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그러나 모든 현상이나 사물이 상징적 그물망에 포획되는 것은 아니다.

쉽게 말해 언어로 지시할 수 없는 모호한 대상이 존재할 수 있고,언어기호가 대상의 의미를 온전히 표상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언어에 의해 구조화된 세계는 실재 세계와 일정한 거리가 존재하는 것이다.

라캉과 슬라보예 지젝은 바로 이점에서 상징계(The symbolic)의 현실과 실재계(The real)는 다르다고 본다.

상징계에서 미처 표현하지 못한 잉여적인 것이 집합된 장소가 실재계라는 것이다.

다시 「매트릭스」로 되돌아가서,영화 속 인류의 실재는 기계와 인간이 전투를 벌이는 폐허의 공간이지만 인류는 컴퓨터로 만들어진 온갖 기호의 조합,다시 말해 상징계를 현실로 받아들이며 살아가고 있다.

자,이제 머리가 꽤 복잡해진다.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은 과연 실재일까,아니면 언어에 의해 구조화된 허구의 상징계일까.

답은 간단하다.

언어로 사유하고 생활하는 이상 인간이 상징계에서 살아가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사막같이 황폐한 실재계가 아니라 달콤한 매트릭스의 공간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언어와 그에 해당하는 개념에 의해 살아간다고 해서 실재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실재계는 종종 상징계에 침입하여 현실의 질서를 교란하고 진실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인간을 성찰하게 만든다.

이를테면 미디어를 비롯한 온갖 상징적 계략에 의해 형성된 '재개발에 대한 기대와 장밋빛 전망'이 올해 1월에 있었던 '용산참사'라는 실재계의 침입을 통해 여실히 깨지는 것을 보라.

'재개발'이란 상징적 의미가 실재계의 비참한 철거민에 의해 무너지지 않았는가.

이처럼 예상치 못한 실재계의 침입은 기존의 의미망에 대해서 심각하게 재고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만든다.

현실에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들,그것의 갑작스러운 출현은 기존 세계에 대한 반성과 성찰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최근 소설에서 이러한 풍경을 발견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상징계의 의미망에서 일탈해 상징계를 교란하는 이야기는 의외로 쉽게 접할 수 있다.

⊙ 커다란 반점,실재계의 얼룩

한강의 「내 여자의 열매」는 '인간은 동물적이다'는 너무도 분명한 상징계의 의미를 교란하는 작품이다.

생각해보면 '동물'이라는 것은 언어에 의해 만들어진 개념이다.

'동물'이란 언어는 그것이 지시하는 모든 대상의 의미를 온전히 표상하지 못할 뿐더러,간혹 기존 관념을 깨뜨리는 사건도 종종 있다.

이런 저런 미디어에 가끔씩 등장하는 외계 생명체 같은 미스터리적인 존재는 이를 증명한다.

따라서 '인간은 동물적이다'는 상징계적인 의미 역시 균열 없는 완벽한 명제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작가 한강의 상상력은 보편적인 명제에 익숙해진 상징계의 인간에게 전혀 예상치 못한 풍경을 제시함으로써 상징계의 질서를 교란시킨다.

「내 여자의 열매」는 결혼한 지 4년차 되는 어느 부부의 이야기이다.

아이가 없는 이 부부에게 어느 날 예기치 않은 엉뚱한 일이 일어난다.

아내의 몸에 까닭 모를 파란 멍이 드는 것이다.

어딘가에 부딪힌 것도 아니고 특별히 아픈 것도 아닌데 둔부며,옆구리며,정강이,허벅지 등 가릴 것 없이 손바닥만한 파란 멍이 들었던 것이다.

처음에 남편은 병원에 가보라고 하며 곧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들은 온몸으로 번져가게 된다.

더군다나 아내는 소화도 잘 안 되고 노란 위액을 토해낼 정도로 건강이 악화된다.

결국 아내는 내과에 다녀왔지만 희한하게도 아무 이상이 없다는 소견만 듣게 된다.

아내는 결혼 전부터 독특한 면이 있었다.

그녀는 결혼 전에 직장을 그만두면서 '혈관 구석구석에 낭종처럼 뭉쳐 있는 나쁜 피를 갈아내고 싶다고,자유로운 공기로 낡은 폐를 씻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었고,상계동 아파트에 집을 얻어 살기 시작할 때에는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갈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었다.

또 결혼한 후에도 아파트 베란다에서 빗물을 받아보고는 '더러운 비야'라며 읊조리며 '여기서는 답답해서 살 수가 없어. 콧물도 가래침도 새까매'라고 적의에 찬 말을 중얼거리기도 했었다.

아내의 치유할 수 없는 반점은 일종의 상징계에 묻은 실재계의 얼룩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말하자면 아내는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희귀하고 설명할 수 없는 병을 앓고 있는데 그것은 상징계의 의료 시스템에서는 파악할 수 없는 그 무엇이며 따라서 그것은 언어로 표상되지도 못한다.

상징계의 그물망을 교란하고 뒤흔드는 실재계의 얼룩인 것이다.

⊙ 기존 질서에 대한 성찰

병원에 다녀왔음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나아질 기색이 없었다.

하지만 남편은 그런 아내를 놔두고 예정대로 어쩔 수 없이 6박 7일간의 해외 출장을 가게 된다.

그리고 출장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그녀는 이미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다.

출장에서 돌아온 날 밤 내가 세 번째 대야의 물을 끼얹었을 때 아내는 노란 위액을 꾸역꾸역 토해냈다.


빠른 속도로,내 눈앞에서 아내의 입술이 오그라붙었다.

떨리는 손으로 그 희끗희끗한 입술을 더듬어보았을 때 나는 마지막으로 알아들을 수 없는 가냘픈 음성을 들었다.

다시는 아내의 목소리를,신음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그녀의 허벅지에서 흰 잔뿌리가 무성하게 돋아나왔다.


가슴에서는 검붉은 꽃이 피었다.

끝은 희고 아랫부분이 노르스름한 도톰한 꽃술이 유두를 뚫고 올라왔다.

치켜올린 손에 약간이나마 힘을 줄 수 있었을 때 아내는 내 목을 끌어안고 싶어했다.

아직 어렴풋한 빛이 남아 있는 눈을 마주보며 나는 그녀의 동백잎 같은 손이 내 목을 잘 안을 수 있도록 엉거주춤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괜찮아? 라고 나는 물었다.

잘 익은 포도알 같은 아내의 눈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 가을 내내 나는 아내의 몸이 맑은 주황빛으로 물들어가는 것을 보고 있었다.


창을 열면 아내의 뻗어올린 두 팔은 바람의 결을 따라 조금씩,매우 조금씩 부드럽게 흔들렸다.

- 한강 「내 여자의 열매」

인용문에서 보듯이 아내는 더 이상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녀는 한 그루 나무의 몸으로 변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나무 인간.

그것은 인간의 상징적인 개념에 대한 완전한 실재계의 침입이다.

반점이 나타나고 위액이 쏟아지는 고통은 모두 실재계가 서서히 드러나는 과정인 것이었다.

'인간은 동물이다'는 기존 상징계의 그물은 실재계의 출현에 의해 훼손되는 것이다.

물론 이 작품은 상상력을 발휘한 허구이다.

어떤 세계에서도 인간이 나무로 변하는 일 따위는 불가능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이 소설에서 뒤흔드는 상징계의 질서란 무엇일까.

다른 것은 몰라도 인간이 도시문명을 이루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상징계적인 현실은 이 소설에서 분명히 전복된다.

도시적인 환경이 생을 살아가는 절대적인 조건인 양 받아들이려 하는 이들에게 이 작품은 충격을 던지는 것이다.

결국 작가 한강은 문학적인 메타포를 활용해 실재계의 일부를 제시함으로써 상징계적인 현실을 반성하고 성찰하게 만든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의 메커니즘이 실은 진실이 아니고 허구일 수 있다고,더불어 인간은 자연을 극복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연의 일부일 뿐이라고 힘주어 외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를 확장해서 이해하면 과연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참된 것인지,아니면 온갖 상징적 장치에 의해 교묘하게 꾸며진 현실이 아닌지를 작품이 묻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어쩌면 인류가 매트릭스의 공간에서 실재를 놓치며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을 품게 만드는 것이다.

전주 상산고 교사 etika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