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둑어둑한 퇴근 길,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겁다. 이윽고 도착한 집.문을 열고 "여보,나 왔어"라고 퇴근 보고를 마치자,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은 나만을 위한 깜짝 콘서트.눈에 넣어도 안 아플 토끼 같은 두 딸이 나를 위해 노래하며 사랑스러운 안무까지 보여주고 있다. '아빠는 나의~ 에너지~.'

기특한 것들… 그래,너희들이 내 희망이다!

잠시 머릿속에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마음 따뜻해지는 이 장면,최근 SK의 기업PR 방송광고 '희망에너지'편이다. '오늘의 희망이 내일의 행복입니다'라는 정갈한 내레이션으로 끝나는 유머러스하고 점잖은 이 광고가 사랑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광고의 소임을 다하는 광고'이기 때문이다.

시대가 변하면서 시청자들은 점점 냉철한 미디어 수용자가 되어가고 있다. 광고가 넘쳐나는 요즘,시청자들은 더이상 광고가 하는 말을 친절하게 인지해주지 않는다. 오직 자신이 보고 듣고 싶은 말을 광고 속에서 찾아내 공감할 뿐이다. 이런 면에서 '희망에너지'편은 광고의 소임을 다하는,고객에게 선택받을 수밖에 없는 '공감형 광고'라고 할 수 있다.

◆'가족'이라는 소재로 고객과 대화하다

최근 얼어붙은 경기를 체감하며 '요즘처럼 어려운 시기가 또 있었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약 10년 전 외환위기 때와 요즘의 광고들을 비교해보면 꽤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불황을 이겨내자'라는 소비자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이전의 광고들은 주로 '애국심'을 소재로 활용했다. 이 때문에 광고 카피에 '나라사랑''제2건국' 등 다소 무거운 말이 자주 등장했다. 조금 더 넉넉했던 과거로 돌아가고 싶도록 사람들의 향수를 자극하는 '복고풍' 광고도 대세였다. 홍수환의 '4전 5기'가 광고의 소재가 되기도 했고,'국민체조'가 광고의 BGM으로 사용되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 광고는 애국심,복고풍과 거리가 멀다. 거창하게 꾸며내 애국심에 호소하지도 않으며,난데없이 복고풍 분위기를 연출해 소비자들에게 현실도피를 종용하지도 않는다. 단지 소비자들에게 아무리 힘들어도 '가족'이 있으니 희망을 잃지 말라고 이야기할 뿐이다. 비록 오늘은 힘들었지만 '희망'이 있으니 내일은 반드시 행복해질 거라고 듬직한 응원을 건넬 뿐이다.

'가족'이란 소재는 기업PR 광고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판매 촉진을 목표로 하는 제품 광고에서도 매우 효과적이다. '가족'은 요즘 같은 불경기에 꽁꽁 얼어붙은 소비자의 마음을 녹일 수 있는 매우 영향력 있는 커뮤니케이션 소재이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게임상품인 '닌텐도 Wii'의 성공 요인에는 온가족이 일렬로 늘어서 한 손에 하얀 막대를 들고 두 눈은 비디오 모니터에 고정한 채 무언가에 열중하는 모습을 담은 TV광고의 영향이 꽤 컸다.

이에 대해 하버드대 존 켈치 박사는 경기 불황으로 소득이 줄어들면 자연히 소비가 감소하는 반면에 적은 비용으로 더 큰 만족을 느낄 수 있는 가족 중심의 지출은 다소 늘어나게 된다고 말했다.

◆밝지만 산만하지 않고,다정하지만 명확한 크리에이티브

SK의 이번 '희망에너지'편은 작위적인 크리에이티브가 배제된,자연스럽게 소비자와 공감대를 형성하고 소소한 감동을 나누는 데 주력한 광고다. 특히 두 딸이 소꿉장난하듯 뒤죽박죽 엉켜 엉성하게 화장을 하고 밤늦게 귀가한 아버지에게 앙증맞은 춤과 '아빠는 나의 에너지~'라며 노래를 불러주는 장면이 인상깊다. 이 부분에서는 SK라는 기업이 오랫동안 존중해 온 '사람'과 '희망'에 대한 가치를 고객들에게 진솔하고 밝고 정겨운 언어로 전달하려는 시도가 엿보인다.

광고는 말한다. SK가 언제 어디서나 세상의 중심이라 외쳐 온 '사람(가족)'이 힘든 시기일수록 우리에게 더 큰 '희망(힘과 용기)'으로 다가오며,그 희망은 결국 내일의 '행복(밝은 미래)'을 만들어낼 수 있는 바탕이라고.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건 서로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희망 에너지입니다'라는 카피도 다정하게 소비자를 배려한다. 많은 내용을 전달하려는 욕심 없이 키(key) 메시지만을 쉽게 풀어 짚어준다. 또한 시청자를 고려해 구성의 기본을 충실히 지켰다. 밝지만 산만하지 않은 비주얼과 다정하지만 명확한 카피로 소비자에게 잘 보이고 잘 읽히도록 조화를 이뤄낸 것이다. 최근 자극적인 비주얼의 홍수와 난해한 카피의 범람으로 겉은 통일이 안 되고 속은 전달이 안 되는 어지러운 광고들과는 분명히 차별화된다.

유장선(광고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