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여왕' '자명고' '천추태후'.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TV 사극들이다. 역사물이라는 것이 원래 교육적 효과도 큰 것인데, 학생들이 이 사극들을 열심히 보다간 국사 시험을 망칠 가능성이 아주 높다. 모티브나 주요 인물을 제외하고는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먼 스토리가 많기 때문이다. 일부에선 '왜곡'을 우려하는 목소리까지 높아지고 있을 정도다.

사극에 작가적 상상력이 더해진 지는 이미 오래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 나온 '주몽' '대조영' '연개소문' 등은 정사 외에 야사나 옛날 이야기가 더해진 경우였지 요즘 사극들처럼 제작진이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한 경우는 별로 없었다.

영웅적인 여성이 주인공이 되는 것도 새 사극들의 공통점이다. 그 때문에 '용의 눈물' '불멸의 이순신'을 보던 중년남성들이 이탈했다지만,목표고객들에게 감성적인 재미와 감동을 주고 '잘 팔리는' 것을 어쩌랴. 대중문화의 상징인 TV드라마에서 '상상 사극'이 잇달아 등장하는 이 같은 변화를 기업들은 눈여겨 봐야 한다. 한국에도 이제 상상력의 시대가 오는가. 기발한 착상에 점수를 주고,상상이 주는 무한한 재미를 더 중시하는 고객들이 시장의 중심으로 등장하는 신호탄은 아닐까.

상상을 중시하는 고객들은 품질이나 가격보다는 디자인이나 재미 같은 감성적인 영역에 더 가치를 두는 사람들이다. 한 업종의 경쟁력 중심이 기능에서 감성으로 바뀌면 기존 고객들 외에 이전에는 고객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비고객까지 몰려오면서 새로운 시장이 형성되기도 한다.

경영이론이나 트렌드에 우리나라만큼 빨리 열광적인 반응을 보이는 나라는 적다. 그러나 검토가 빠를 뿐 막상 실천에는 우리만큼 느린 경우도 없다. 감성과 상상력,창조경영이 중요하다는 사실과 세계적인 실천 사례는 많이 알지만,우리 회사와는 별 상관이 없다는 식이다.

상상에 관한 한 우리 기업들에 잠재력이 있긴 한 걸까. 이미 세계적 기업의 반열에 오른 몇몇 회사 빼고는 사실은 기대난이다. 여전히 기술과 영업,마케팅에 승부를 걸고 있다.

멕시코의 세계적인 시멘트 회사 세멕스의 레미콘 사업부의 슬로건이다. "우리 레미콘 사업은 야채 사업이다. 야채는 시들면 못 팔고 레미콘은 굳으면 못 판다. 우리의 핵심 경쟁력은 스피드!" 이런 '상상력 고수' 기업이 우리에게도 있을까.

상상력을 자극할 만한 공간배치도 중요하다. 구글 본사의 휴게공간에 그랜드피아노,당구대,화이트보드,간이식당이 서로 몇m 사이에 모여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상상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교묘한 장치다.

상상력에 관한한 우리 사회의 잠재력은 높아 보이지 않는다. 이념적 대립으로 절대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는 풍토에서 다양성은 교류되지 않는다. 그래서 상상력도 소수의 천재나 괴짜의 영역으로 치부하는 경향까지 보인다. 실제로 사극이 유행하는 것 자체가 상상력의 빈곤을 드러내는 증거라는 지적도 있다.

구조조정기는 이제까지 고민하던 것을 실천하기에 적합한 시기다. 이왕 바꿀 것 확 바꿔보는 시도는 어떨까. 더 엉뚱해지고,더 망가지는 시도가 늘고 개성있는 경영자들이 '미친 척'하는 분위기가 있으면 좋겠다. 그 모습이 여간해선 상상이 되지 않는다는 게 문제지만.

권영설 한경 아카데미 원장 yskw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