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핀란드에서 만들고 있는 세계 최대의 크루즈선 기사가 여러 신문에 났다. 영화로 유명해진 비운의 유람선 '타이타닉'보다 5배나 큰 22만5000t짜리 '바다의 오아시스'가 11월 완공된다는 소식이다. 한국의 STX그룹이 핀란드의 이 조선소를 지난해 인수했고,STX유럽이 '오아시스'를 만들고 있다. 이렇게 배워 익힌 기술이 이 땅의 조선소에서 더 훌륭한 유람선을 만들 날도 머지 않은 듯하다.

배를 만들고 해양을 탐험하는데 우리 역사는 그리 찬란하지 못하다. 거북선이 자랑스럽고,해상왕 장보고도 있지만 우리 선조들은 그 이후 해상활동을 크게 벌여본 적도 없고,해상무역에 성공한 부자도 없다. 몇 년 전 일본에서 공부하면서 동아시아 3국의 외국 거류민 실태를 조사한 적이 있다. 19세기 말까지 중국인들은 인도양 연안까지 상당히 많은 화교들이 살며 고국과 통상하고 있었고,일본인들 역시 교민사회가 인도차이나 반도와 필리핀 일대에 형성돼 있었다. 하지만 같은 기간 조선 사람들은 이 지역에 교포사회를 만들어 본 일이 없다.

중국의 경우 대표적인 역사로는 명(明)의 환관 정화(1371~1433년)의 탐험대가 15세기 초 일곱 차례나 해양 탐험에 나선 일을 들 수 있다. 제1차 항해에는 배 317척에 2만8000명이 참가했고,그 탐험은 동남아 인도 아라비아를 지나 아프리카 동해안에 미쳤다. 일본의 경우 가장 흥미로운 탐험은 1615년 11월 교황을 알현한 지창상정(支倉常長 · 1571~1622년)이 있다. 그는 일본 북부 센다이의 영주 이달정종(伊達政宗 · 1567~1636년)의 명을 받아 배를 만들어 180명이 로마까지 왕복 항해했다.

도쿠가와 막부 200여년 동안 조선인 일본 표류자는 대강 3400명이었는데,조선에 표류해 온 일본사람은 약 1000명이었다는 연구도 있다. 이렇게 조선 표류자가 많아서 일본은 대마도에 표민옥(漂民屋)을 두어 이들 표류외국인을 관리하기도 했다. 한데 이렇게 제법 많은 표류 조선인들은 거의 다 고국에 돌려보내졌다. '본국송환'은 동아시아 세 나라가 거의 비슷했으니 일본에 조선 교민사회가 세워질 까닭이 없었다. 그런데 같은 기간 일본인으로 해외에 나간 사람들은 10만명 이상이며 이들이 동남아 등에 정착했다.

이 시기부터 서양은 동아시아에 침투하기 시작했다. 장사꾼과 선교사 등이 밀려든 것이다. 일본의 영주들은 다투어 서양인들의 지혜를 빌리려고 노력했다. 아주 중화적(중국 중심)이었던 중국인들은 서양인들을 내버려두고 상대하지 않았지만,일본 영주들 사이에는 그들의 지혜를 빌리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최고권력자 도쿠가와 자신이 난파해 들어온 윌리엄 아담스를 고문으로 임명한 일도 있고,이달정종은 가톨릭 선교사 루이스 소텔로의 자문을 얻어 로마 교황청에 사절단을 보내기도 했다.

세 나라의 배 만드는 재주에 큰 차이가 있었던 것이 아니다. 역사와 문화의 차이에서 조선은 일본이나 중국에 비해 훨씬 폐쇄적이었다. 그랬던 한국이 이제는 정화가 도달했던 바다에 해적 소탕의 군대를 보내고,일본 센다이에는 매일 우리 비행기가 관광객을 실어 나른다. 몇 주일 뒤에는 한국형 우주선 나로호가 하늘에 치솟을 예정이고,한국의 반도체 상품은 세계제일을 뽐낸다. '오아시스'도 이런 과학기술 진보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하지만 아직 우리는 거기에 걸맞은 사회 발전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 유람선을 아무리 잘 만들면 무엇하나. 나 같은 한국 사람이 부산이나 인천에서 '오아시스'를 타고 크루즈를 떠나는 일은 당분간 오지 않을 것 같으니…. 게다가 북녘에는 1세기 전보다도 훨씬 폐쇄적인 같은 민족이 둥지를 틀고 있으니….

박성래 <한국외대 명예교수ㆍ과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