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성장률처럼 민주주의의 수준도 계량화가 가능할까. 영국 경제전문지 이코노미스트는 해마다 전 세계 국가를 대상으로 민주주의 수준을 평가해 발표한다. 이코노미스트는 지난해 한국을 완전한(Full) 민주국가 그룹인 28위로 평가했는데,인류 전체의 상위 14.4%에 속하는 수준이다. 근래 한국은 이코노미스트의 평가에서 항상 30위권대로 '완전한'의 다음 단계인 '흠있는(Flawed)' 민주국가를 벗어난 적이 없다.

최근 민주주의 후퇴론이 등장하고 전직 대통령 입에서 독재의 부활이 논해지고 있는데,과연 독재는 어떻게 가능한가. 이는 경제의 독점과 같이 무경쟁 상태가 필수다. 권력이 아무리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정보를 통제하더라도,야당이 존재하고 자유로운 선거가 보장되면 언제라도 권력의 자리에서 밀려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막기 위해선 집권세력도 유권자의 표를 얻기 위해 다수의 뜻에 무작정 맞설 수 없게 되며,결국 독재는 어렵게 된다.

정치적 경쟁체제와 독재는 양립이 불가능하기에,민주주의를 선전간판에 불과하게 만들려면 정교한 불능화 장치가 필수적이다. 예컨대 유신체제는 국회의원 3분의 1을 사실상 대통령이 임명해 여당의 국회 다수를 제도적으로 보장했고,역시 대통령도 관제조직인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해 정권교체의 가능성을 아예 봉쇄했다. 22년 전 6월 항쟁과 직선제 개헌이 민주주의 시대를 열었다고 말하는 것은,자유롭고 평등한 선거권의 획득을 위한 투쟁이 민에 의한 권력의 통제를 뜻하는 민주주의를 가능케 한 요체이기 때문이다. 역시 이코노미스트 또한 '공정한 선거과정'을 민주주의 평가의 제일항목으로 택하고 있다.

경쟁적 정치제도 하에서 이를 무시한 권력의 독선은 어느 정도 가능할까. 우리는 5년 단임 대통령제라서,이론상으론 대통령은 이후 선거의 승패를 초월해 다수의 반대를 무릅쓴 소신정치가 가능하나,실제론 최소한 세 가지 견제를 넘어야 한다. 우선 야당의 반대는 논외로 하고 여당의 견제다. 거의 해마다 선거를 치러야 하는 여당은 대통령이 원하는 인기없는 정책의 입법에 협조를 주저한다.

최근 한나라당의 지지율이 추락하자 여당속의 야당처럼 보이려는 의원들이 늘어나고 있는데,여당의 현직 대통령과의 선 긋기는 우리 정치사에서 이미 지루하게 반복된 일이다.

둘째,사법적 견제다. 한국은 위헌적 정책에 대한 차단장치가 잘 발달돼 있고,사법부는 민주적 권리에 속한다고 간주되면 일정한 법 위반조차 관용을 베푼다.

셋째,사법부의 영장집행조차 거부하는 방송사가 있을 정도로 자유와 권력을 동시에 누리고 있는 언론이 가만두지 않는다. 정파성이 강하기로 유명한 한국 언론의 집요한 매를 맞으면서 내상을 입지 않는 권력자란 존재하기 어렵다. 결국 한국의 민주제도하에서 독재는 가능하지도 않으며,그 시도는 정치적 자살행위가 된다.

국가운영을 해본 전직 대통령이 독재에의 저항을 선언하고 나왔는데,그 계기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이란 점에서 참으로 민망하다.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검찰 수사를 권위주의 시대의 부당한 정치핍박과 동일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화 이후 아무리 대통령이라 해도 검찰 수사를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다는 건,재임 중에 자식이 감옥에 가는 것을 지켜봤던 분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권위주의 시대를 경험하지 못한 세대가 독재를 운운한다면,타임머신에라도 태워서 자유의 억압이 무엇인지 보여주거나,국제 민주주의 평가에서 항상 꼴찌를 하는 저 북한체제를 보라고 하면 되겠다. 독재와 민주를 모두 겪은 사람이 북한체제의 참혹한 진실까지 외면하는 경우라면 차라리 침묵의 선택이 나을 듯하다. 토론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홍진표 시대정신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