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말 팬택의 박병엽 부회장이 전화를 걸어 왔어요. 이후 저녁식사 자리에서 상임고문직(사장급)을 제안하더군요. 평생을 군인으로만 산 사람이라 정보기술(IT)업계엔 어울리지 않는다고 사양했더니 회사를 키우는 데 도움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

차영구 신임 퀄컴코리아 사장(62)은 34년간 군 생활을 한 예비역 중장이다. 국방부 정책실장을 끝으로 2004년 초 예편한 그가 첨단 IT업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박 부회장과의 만남이 계기가 됐다. 당시 팬택은 미국통이자 외교 · 안보 전략가인 차 사장의 인맥이 필요했다. 최대 휴대폰 수출시장인 미국에서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차 사장은 이후 팬택에서 전략,교육,구매 담당 상임고문직을 맡으며 현재의 직장인 퀄컴과도 인연을 맺는다. "팬택에 있을 때 주요 업무는 퀄컴과의 로열티 협상,칩 구매 등이었죠.협상 테이블에 앉으면 치열한 기싸움에 침이 마르기도 했지만 IT산업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됐습니다. "

퀄컴 측이 그를 주목한 것도 이때부터다. 그의 깔끔한 일처리와 협상능력,폭넓은 인맥이 강점으로 작용한 때문이다. 지난 4월 방한한 폴 제이콥스 퀄컴 회장은 한미협회 주최의 행사장에서 차 사장을 처음 만났다. 지난달 초 사장직을 공식 제안했다.

차 사장은 퀄컴의 부정적 이미지를 씻겠다고 강조했다. 그는 "퀄컴은 세계적인 기술기업인데 한국에서는 휴대폰 로열티 문제만 주로 부각돼 안타깝다"며 "퀄컴과 한국 기업들이 상생할 수 있는 다양한 비즈니스 모델을 발굴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퀄컴은 한국에 퀄컴테크놀로지라는 또 다른 회사를 두고 아시아지역 마케팅을 맡도록 하고 있다. 차 사장은 "퀄컴테크놀로지가 보병이라면 내가 맡은 퀄컴코리아는 보병 전투를 지원하는 포병 역할"이라며 "한 · 미 양국의 IT산업 발전을 위해서도 이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기업 간 관계는 근본적으로 갈등과 상생이 반복한다는 이론도 펼쳤다. 그는 "퀄컴은 삼성전자 LG전자 등과 함께 한국의 부호분할다중접속(CDMA) 방식의 휴대폰 기술을 세계로 뻗어나가게 했다"며 "때로는 서로 갈등도 있겠지만 힘을 모아 시장 규모를 키워나가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차 사장은 퀄컴을 통해 한국과 미국을 잇는 가교역할도 하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다. "군 시절부터 지금까지 한 · 미관계 분야에서 평생 일해 왔습니다. 외교 · 안보 분야에서 쌓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민간 기업에서도 한국과 미국이 함께 발전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

1947년생인 차 사장은 육군사관학교(26기)와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사회과학대학원에서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4년 예편한 뒤 서울대 국제대학원 초빙교수를 거쳐 경희대 평화복지대학원 객원교수로도 활동했다. 국방부 정책실장 시절 용산기지 이전,주한미군 감축 등 굵직굵직한 협상을 주도하며 한 · 미관계에 정통한 전략가로 이름을 날렸다.

안정락 기자 jr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