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자,특히 회사를 물려받은 2세 경영자에게 '실패'만큼 좋은 공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실패를 통해 '경영의 ABC'를 배웠거든요. 다만 되도록 어린 나이에,가능한 작게 경험해야 됩니다. 너무 늦은 나이에 큰 좌절감을 맛보면 재기의 밑거름이 될 수 없기 때문이죠."

이양구 사장은 어디 가서든 자신의 실패담을 스스럼 없이 얘기한다. 그 경험이 없었다면 아직도 '엉터리 CEO(최고경영자)'로 남았을 것이란 이유에서다.

이 사장이 뼈아픈 경험을 한 시점은 1994년부터 6년 가량 동성제약 계열사였던 오리리화장품을 이끌던 때였다. 당시 오리리화장품은 자체 공장을 마련,동성제약에 맡겨온 위탁생산 시대를 접고 제2의 도약을 다짐하던 시점이었다. 아버지는 "실전 경영을 해보라"며 32세에 불과한 이 사장을 오리리화장품의 경영기획실장으로 임명했지만,그 때의 그는 재무제표조차 못 읽을 정도로 '준비되지 않은 경영자'였다. 영업과 마케팅 역시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많았다. 대학에서 법학(연세대)을 전공한 뒤 한동안 고시에 매달렸던데다 1989년 동성제약에 입사한 뒤에도 줄곧 기흥공장에서 생산 관련 업무만 맡았으니 그럴만도 했다. 수년 뒤 CEO로 승진한 뒤에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의욕은 넘쳐 흘렀지만 노하우는 없었어요. 제가 보기에 오리리의 제품 경쟁력이 뛰어난 만큼 생산량을 늘려도 다 팔릴거라 생각했습니다. 주력이었던 파운데이션 뿐 아니라 기초화장품으로 영역을 넓혀도 성공할 것 같았고….하지만 오판이었습니다. 소비자들은 저만큼 오리리를 인정해주지 않았어요. 판매가 부진하다보니 '밀어내기'를 했고 이게 쌓이다보니 무너진 겁니다. "

결국 2000년 동성제약은 오리리화장품의 부채를 떠안고 흡수했다. 오리리화장품의 손실규모는 100억원에 육박했다. 당시 화장품업계 상황이 좋지 않았던 점과 주요 의사결정은 모회사인 동성제약을 포함해 여러 경영진이 함께 내린 점을 감안하면 이 사장에게 모든 짐을 떠맡길 일은 아니었지만,그는 "모든 책임을 지겠다"며 유학을 선언했다.

하지만 "피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라는 아버지의 간곡한 설득에 이 사장은 유학 계획을 철회하고,동성제약의 재무 담당 부사장을 거쳐 이듬해 대표로 취임했다. 이 때의 이 사장은 1990년대 중후반의 그가 아니었다. 그 때는 몰랐던 경영의 비밀을 한번의 실패를 통해 상당 부분 터득한 덕분이었다.

"돌이켜보면 오리리화장품이 쓰러진 원인은 '주제 파악'을 잘 못한 데 있었습니다. 오리리의 낮은 브랜드 파워와 제품 경쟁력을 인정하고 그에 걸맞는 마케팅 전략을 짰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지도 모르죠.이제 그런 실수는 안할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약 개발에 '올인'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동성의 능력을 벗어나는 일이거든요. 우리가 잘 하는 염색약에 집중하는 동시에 해외 제약사의 신약을 도입하는데 힘을 쏟을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