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창재 경제부 기자 yoocool@hankyung.com

3일 서울 남대문로에 있는 신한은행 본점 앞.워크아웃 업체인 월드건설이 분양해 입주를 시작한 대구 범어2차 아파트 입주자 100여명이 'I LOVE 신한은행'이라고 쓰인 푯말을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지나가는 행인들은 물론 은행원들도 아파트 입주자들의 신한은행에 대한 때아닌 구애(求愛)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위자들이 외치는 구호는 더 이상했다. "주채권은행인 신한은행이 월드건설에 대한 금융 지원을 중단하라"는 것.건설사 고객들이 은행에 몰려와 건설사를 망하게 해달라고 주장하는 셈이었다.

사정을 알아보니 이들이 원하는 건 역시 돈이었다. 시위자들은 대부분 4년 전쯤 아파트를 분양받아 입주를 완료한 사람들이다. 이후 월드건설이 미분양을 해소하기 위해 할인분양에 나섰고 이에 따라 아파트값이 떨어지자 가격하락분(20%)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하지만 당사자인 월드건설이 난색을 표했고 이들은 주채권은행인 신한은행을 통해 우회 압박을 하는 전략으로 선회했다. 채권단의 지원이 끊기면 부도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워크아웃 업체의 약점을 간파한 셈이다.

이들은 신한은행 임원들에게 편지도 보냈다. "신한은행과 같은 세계적인 금융회사가 월드건설과 같은 저급한 건설회사에 자금을 지원하는 건 일종의 수치"라거나 "미래가 보이지 않는 부실건설업체 월드건설에 더이상 자금을 투자하는 건 신한은행의 가치를 훼손하는 일"이라는 게 주요 내용이었다.

문제는 주채권은행을 어르고 달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데 있다. 시위에 동참한 130세대에 가격하락분을 보상하면 30억~50억원의 돈이 들지만 나머지 200여세대가 형평성을 문제삼아 보상을 요구하고 나설 경우 비용이 100억원을 넘어간다. 뿐만 아니라 미분양 해소를 위해 할인 판매에 나선 모든 건설사에 보상요구가 봇물치면 안 그래도 경영이 위태로운 건설사들에 엄청난 리스크로 작용할 수 있다.

물론 잘못한 것도 없이 아파트 값 하락이라는 쓴 맛을 보고 있는 입주자들의 아픔을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이들이 서울에 있는 은행에까지 찾아와 시위를 벌이고 건설사와 은행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현 경제 상황에 가슴이 답답해올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