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 전 이맘 때로 거슬러 가보자.1998년 6월18일이었다. 당시 이헌재 금융감독위원장과 배찬병 상업은행장은 55개 퇴출기업 명단을 발표했다. 대부분 법정관리 등 사실상 퇴출상태에 있던 기업이라 놀랄 건 없었다. 눈에 띄는 것은 현대 삼성 등 5대 그룹 계열사 20개가 포함됐다는 점.당초 채권단은 5대그룹 계열사를 퇴출대상에서 제외하려 했다. 그러나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기업구조조정작업이 지지부진하다"고 질책하면서 상황은 반전됐다. 감독당국은 채권단을 압박했고,껍데기일 뻔했던 퇴출기업 명단은 그런대로 모양새를 갖추게 됐다.

11년 후인 지난 1일.금호아시아나그룹과 산업은행은 재무구조개선 약정을 맺었다. 하루 전만 해도 "당장 대우건설을 내놓으라"는 산은과 "9월까지 시간을 달라"는 금호의 입장차는 제법 팽팽해 보였다. 그렇지만 어떡하든 재무구조개선 약정을 체결해야 한다는 절박감이 절충점을 찾아내게 만들었다. 지난 4월만 해도 감독당국은 채권단 주도의 자율구조조정을 내세우며 한발 물러서 있었다. 그러나 지난 4월 말 "구조조정할 기업들이 빨리 구조조정돼야 건실한 기업이 살아날 수 있다"는 이명박 대통령의 발언을 계기로 상황은 변했다. 진동수 금융위원장과 김종창 금융감독원장이 직접 나섰고,결국 앞으로 문제를 일으킬 것으로 간주된 9개 그룹은 재무구조개선 약정에 사인했다.

외환위기 직후와 지금은 많이 다르다. 우선 위기의 시발점이 같지 않다. 기업들의 체질도 확연하게 바뀌었다. 기업 구조조정 방식도 마찬가지다. 기업을 죽이자는 게 아니라 위기를 미리 방지하자는 데 요즘 구조조정의 방점이 찍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날 갑자기 구조조정 방향을 바꿔 기업들을 몰아붙이는 감독당국과 채권단의 모습은 그때나 지금이나 절묘하게 닮아 있다.

이러다보니 기업들로부터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시한을 정해놓다 보니 개별 기업이 처한 특수 상황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일률적인 잣대를 들이댔다는 불만이 많다. 단기간에 가시적인 성과를 얻으려다보니 기업의 미래 성장동력마저 해칠 수 있게 됐다는 지적도 상당하다.

이런 불만에 채권단은 어이없어한다. 그동안에도 '배째라'하다가 이제 와서 시간을 더 달라는 기업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는 분위기다. 한 관계자의 말을 빌리면 "A계열사는 핵심 회사라서 못 팔겠고,B계열사는 값이 너무 싸서 못 팔겠다고 하면서 시간만 벌겠다는 게 대기업 그룹들의 속내"니 말이다.

중요한 건 기업구조조정은 이제 시작이라는 점이다. 채권단과 9개 대기업그룹이 맺은 것은 약속에 불과하다. 그 약속을 제대로 실행하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금융권 여신이 500억원 이상인 대기업 중 부실우려가 있는 것으로 평가된 430여개 대기업에 대한 구조조정도 시작해야 한다.

그런 만큼 앞으로 구조조정은 더욱 정교해져야 한다. 목표와 방향도 분명해져야 한다. 다양하고 유연한 맞춤형 방법론도 나와야 한다. 그렇지 않고 지금처럼 '어느날 갑자기'식의 구조조정을 지속할 경우 대상이 아닌 기업들의 투자심리도 더욱 움츠러들 수밖에 없다. 겉으론 기업을 살리는 구조조정이라고 말하면서도 어느날 갑자기 몇 개 기업을 죽여 '한 건'하는 방식으로 돌변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있어 하는 얘기다.

하영춘 산업부 차장 ha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