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화학업체인 A사는 최근 화학원료 공장의 생산능력을 두 배로 높이는 투자를 했다. 이 공장의 고용인원은 150명.설비를 배로 늘렸으니 일자리도 100명 이상,최소한 수십명은 늘어났을 것 같지만 답은 '딱 5명'이다. 공장자동화 투자에 공을 들인 결과다.

타이어를 만드는 B사는 생산능력 확대가 필요해졌다고 판단,추가 투자를 서두르고 있지만 국내에 공장을 더 짓는 것에는 회의적이다. 기존 국내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1500명의 생산직 근로자 평균 연봉이 7500만원에 이를 정도로 인건비 부담이 너무 높은 탓이다. 생산직의 평균 연령은 40세를 넘었고,50대 중반 이상 200명가량은 연봉이 1억원을 넘는다.

업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개당 5만~10만원짜리 '신발보다 값이 싼' 타이어를 만들어야 하는 상황에서 감당하기 힘든 인건비다. 이익률을 높이기 위해 고부가 고급 타이어를 더 많이 개발해서 팔고 싶지만 노조에 발목이 잡혀 있다. 제품 라인업 개선에 따른 인력 재배치에 노조가 반대하고 있다. 이 회사는 요즘 중국과 동남아에서 공장 부지를 물색하고 있다.

올 들어 매달 일자리가 10만개 이상 급감,고용률이 선진국(70% 선)에 크게 못 미치는 60% 안팎에 머무르면서 '일자리 늘리기'에 정부의 신경이 곤두서 있다. 기업들에 투자를 늘려 새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달라는 요구의 수위도 높아지고 있다.

이달 하순 청와대에서 대통령 주재로 열리는 재계 총수들과의 간담회에서도 투자와 고용 확대가 주요 아젠다로 잡혀 있다.

정부 고위 인사들 사이에서는 "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출자규제를 풀어주는 등 규제완화를 밀어붙여 왔는데 기업들이 뭘 해주는 게 있느냐"는 원망의 목소리가 커지는 분위기다. 뭣 때문에 욕먹어가며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해야 하느냐는 말까지도 들린다.

이런 얘기를 전해듣는 기업인들은 가슴이 울컥해지고 답답해진다고 하소연한다. 기업들이 투자를 하더라도 고용효과가 크지 않은 자동화설비에 주력할 뿐,사람을 많이 채용해야 하는 경우 해외로 눈을 돌리는 까닭을 정말 몰라서 하는 소리냐고 어이없어 한다.

문제의 핵심은 고용유연성이다. 철밥통 노조의 기득권에 손도 댈 수 없는 제도적 환경을 방치한 채 기업들에 '투자 확대'를 다그치는 건 블랙 코미디다. 정부가 고용유연성에 대한 해답부터 내놓는 게 일의 순서다. 하지만 이달 안에 매듭을 지어야 할 비정규직법은 계속 표류하고 있고,10년 넘게 미뤄온 노조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등을 담은 개정 노동관련법이 내년부터는 과연 시행되는 건지도 아직 불투명하다.

이런 와중에 민주노총을 비롯한 노조세력은 불황을 아랑곳 않는 임금 인상 요구에다 비정규직 철폐 등 정치적 이슈까지 얹어 강도 높은 '6월 투쟁'을 예고하고 있다. 정부가 일자리와 투자를 올바로 고민하고 있다면,떼법에 휘둘리는 '노조공화국'이라는 이 나라의 해묵은 오명부터 온전히 벗겨내야 한다. 그런 노력은 소홀히 하고 만만한 기업만 닥달하는 '무늬만 비즈니스 프렌들리 정부'라는 비판을 듣는 일은 없기 바란다.

이학영 부국장겸 산업부장 ha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