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고시에 합격한 뒤 30년을 공직자로 살아왔다. 그러다 증권회사 최고경영자로 자리를 옮긴 지 이제 1년이 조금 지났다. 이 얘기를 듣고 별 관심없는 사람들은 이력서에 경력 하나 추가되는 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직접 겪어본 나는 새로 태어난 느낌이다.

공무원은 이해 관계자들의 의견을 들어주는 '갑'의 입장이기 때문에 고객을 찾아 다니며 부탁할 일이 별로 없다. 반면에 증권회사 CEO는 매일 고객을 만나야 하고,하나의 거래를 따내기 위해 기관투자가나 기업 재무담당자를 찾아가 사정하기도 한다.

지난 1년간 새 업무를 하나씩 배우면서 증권회사가 어떻게 영업을 하고 돈을 벌어들이는지 알게 됐다. 그러면서 작년에는 미국의 투자은행 부도 후폭풍으로 증시가 폭락하면서 가슴을 졸이기도 했고,연초부터는 주가가 회복되면서 다시 얼굴에 미소를 머금기도 했다. 증권회사의 이러한 애환을 2500여 직원들과 함께 하면서 나도 어느덧 증권맨이 다 된 것 같다. 그래서 이제는 친구들을 만나면 펀드나 CMA에 가입하라고 주저없이 권하기도 하고,심지어 영업을 위해 후배들에게 고개를 숙이기도 한다. 투자은행(IB) 관련 딜을 성사시키기 위해 서슴없이 아쉬운 소리를 하기도 한다. 1년 만에 장사꾼이 다 된 내 모습을 보면서 스스로 놀라게 된다.

민간기업 중에서도 증권회사는 일반 제조업체와 또 다르다. 제조업체는 경쟁사,소비자 기호,정부정책 같은 것들이 외부변수다. 이러한 변수는 일부 예측 가능하기도 하고 대응하기 위한 시간적 여유도 있다. 하지만 증권회사는 글로벌경제 같은 외부변수에 따라 주가지수가 출렁거리면서 매출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기도 하고,회계처리 구조가 복잡한 파생상품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매출이 마이너스로 잡히기도 한다.

이처럼 통제도 안 되는 외부변수를 예측해 회사전략을 수립해야 하는 것은 기본이고,각 사업부별로 업무의 성격이나 이해 관계가 너무 상이하기 때문에 조정자로서의 역할도 중요하다. 노사관계만 해도 그렇다. 노사가 때론 대립하더라도 부부처럼 함께 가야 한다. 그래서 일정 범위 내에서 노조가 요구하는 바를 수용해야 하며,그렇다고 무조건 수용하면 인기에 영합한다는 비판을 받을 소지가 있다.

같은 회사의 조직인 데도 서로 이해가 상충되는 부분도 많고,직원들도 많다 보니 화합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결국 최고경영자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와 같다. 다양한 음색을 가진 악기들을 조화시켜 관객들에게 웅장한 관현악곡을 선사하듯이 최고경영자도 구성원이 갖고 있는 재능과 열정을 한 데 모아 직원,고객,주주 등 이해 관계자들을 만족시킬 수 있도록 해야한다. 그래서 증권회사의 최고경영자는 슈퍼맨(?)일 수밖에 없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