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이 R&D(연구 · 개발)와 마케팅의 시중을 들고 있는 판에 어떻게 아이팟과 같은 혁신적인 제품을 만들겠습니까. "

글로벌 디자인 기업인 탠저린의 이돈태 사장(41 · 사진)은 27일 삼성 사장단을 대상으로 '미래 기업의 생존 디자인'에 대한 강연을 마친 뒤 "삼성,LG 등 일부 한국 기업들이 디자인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멀다"며 쓴소리를 시작했다.

그는 "R&D 부서는 제품 개발이 완전히 끝난 뒤에야 디자이너들을 부르고,마케팅 부서는 소비자 조사 데이터를 들이밀며 트렌디한 제품을 만들 것을 요구한다"며 "이 같은 환경에서는 소비자들이 '와우'라고 반응할 만한 획기적인 디자인의 제품이 나오기 힘들다"고 말했다. 이어 "단절적이고 파괴적인 디자인 변화를 주도하는 기업이 시장을 독식한다"며 "기존의 것을 꾸준히 보완하는 방식으로는 결코 승자가 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삼성 사장단을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도 창조적인 디자인에 대한 설명이 나왔다. 이 사장은 삼성 계열사 사장들에게 "경쟁사의 디자인 전략이나 최신 디자인 트렌드 등을 의식하지 않는 자신만의 디자인 표준을 갖춰야 한다"고 제안한 뒤 이를 '미(me) 패러다임'이라고 명명했다.

이 사장에 따르면 1990년대 초 유럽 시장에서 첫선을 보인 삼성전자의 폴더형 휴대폰이 이런 패러다임의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 유럽에는 묵직하고 견고한 막대(바) 형태의 제품이 시장을 주도했다. 삼성전자는 현지 소비자 대상 조사에서 '장난감 같다'는 평가를 받은 폴더폰의 출시 여부를 고민하다가 "일단 부딪쳐 보자"는 결론을 내렸다. "남들과 똑같은 제품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폴더폰은 휴대폰 디자인의 패러다임을 바꿨고 유럽에서 '애니콜 신화'를 만드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이 사장은 "새로운 패러다임의 디자인을 통해 끌어들인 고객을 단골로 만들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곳'까지 신경쓰는 세심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애플은 초창기 노트북인 '아이북' 내부에 조립식 수리 도구를 집어 넣었다. 고객들은 컴퓨터에 문제가 생겨 제품을 분해해야 할 상황에 놓인 다음에야 이 도구를 발견할 수 있다.

이 사장은 "애플 마니아들이 많아진 이유는 이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까지 손길이 미치는 배려심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질적인 요소들을 결합,시너지 효과를 발휘하는 '파트너십'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강조했다. 좌뇌형 CEO(최고경영자)와 우뇌형 디자이너의 의견을 적절히 조율할 수 있는 기업의 디자인 경쟁력이 높다는 게 이 사장의 견해다.

실제 제품 디자인에도 같은 논리가 적용된다. 이 사장은 "동양의 좌식문화와 서양의 입식문화를 조화시킨 가구,커피숍 형태를 띤 은행 등이 '디자인 이종교배'를 통해 성공한 대표적인 사례"라고 말했다.

이 사장은 김영세 이노디자인 대표와 더불어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 디자인 업계의 거물로 꼽힌다. 애플,도요타 등의 제품 디자인을 했던 글로벌 기업 탠저린의 인턴으로 사회생활을 시작,30대에 이 회사 공동 대표가 됐다. 현재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지역을 총괄하고 있다.

한편 이날 삼성 사장단 회의에는 이윤우 부회장 등 계열사 CEO 30명이 참여했다. 사장단은 강연을 마친 뒤 서울 역사박물관에 마련된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분향소를 단체로 방문했다.

송형석 기자 clic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