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지난 21일 식물인간 상태에 빠진 김모씨(77 · 여) 가족이 세브란스병원을 상대로 낸 '무의미한 생명연장 치료 장치 제거 등 청구소송'에서 인공호흡기를 떼라고 명령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는 존엄사를 인정한 대법원의 첫 판결로서 앞으로 말기암 환자 같은 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를 환자 자신 또는 가족의 의사와 관계없이 연명치료를 하지 않아도 되는 길이 열렸다.

하지만 종교계와 법조계 일부에서는 존엄사에 대해 여전히 반대하고 있어 논란이 쉽게 수그러들 것 같지는 않다.

이번 판결에서 9명 중 4명의 대법관들은 "환자의 상태가 회복 불가능한 사망 단계라고 단정하기 어렵고,환자가 현재 시점에서 연명치료 중단을 바라고 있는지 추정하는 것도 어렵다"며 반대 의견을 내놨다.

천주교 쪽에서도 "환자의 상태나 의료 행위의 조건이 환자마다 다른 만큼 이번 대법원의 판결을 법적 기준처럼 일률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현행 형법상 살인방조죄로 처벌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의료 현장에선 환자나 가족 의사에 따라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게 관례화돼 있다.

세브란스병원은 존엄사 가이드라인을 마련했으며, 서울대병원 또한 암환자 두 명으로부터 '말기 암환자의 심폐소생술 및 연명 치료 여부에 대한 사전의료지시서' 서명을 받아내는 등 존엄사를 인정하는 조치를 취해왔다.

존엄사 허용 논란을 분석해본다.

⊙ 찬성 측 "환자에게 인간답게 죽을 권리를 줘야"

존엄사 허용을 찬성하는 쪽에서는 생명보조 장치에 의존해 삶을 인위적으로 연장하는 것보다는 '삶의 질'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 속에서 무리하게 삶을 이어가느니 차라리 인간답게 죽을 수 있는 권리,고통에서 해방될 권리를 주는 게 낫다는 논리다.

게다가 회복이 불가능한 환자에게 의료행위를 계속하는 것은 가족뿐만 아니라 의료진과 병원,나아가 사회 전체에 엄청난 경제적 손실을 가져온다고 지적한다.

일부에서 존엄사를 합법화할 경우 치료보다는 안락사를 해결책으로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하지만 허용 기준을 강화하고 악용을 감시한다면 그러한 부작용은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대법원도 이번 판결문에서 "짧은 기간에 사망에 이를 것이 명백할 때는 사망 단계에 진입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며 "치료를 계속하는 것은 인간 존엄성을 해치는 일인 만큼 환자의 의사를 추정해 연명치료를 중단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미국 프랑스 독일 등은 품위있게 죽겠다는 의사를 평소 글이나 유서 등으로 표현해 둘 경우 존엄사를 허용하고 있고, 일본도 의사 2명 이상이 '회복 불가능'이라고 판단한 환자에겐 본인 의사에 따라 치료를 중단하고 있다.

⊙ 반대 측,"생명 경시 풍조를 낳고 인간의 존엄성 훼손될 것"

이에 대해 반대하는 쪽에서는 "어떤 사람의 생명이 타인의 판단에 따라 결정되는 사회에서는 인간의 생명이 안전하게 보장될 수 없으며,이는 곧 생명 경시 풍조를 낳게 된다"고 지적한다.

더욱이 존엄사가 합법화될 경우 자살 또는 살인과 명백히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에 사회적으로도 악용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우려한다.

게다가 사회 약자들,특히 신체 · 정신적 장애인이나 노인,빈곤층에 존엄사는 '죽음을 선택할 권리'가 아니라 '죽어야만 하는 의무'가 될 수 있다고 꼬집는다.

회복 불가능한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는 게 아니라 '귀찮고 쓸모없는 인간'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얘기다.

사전의료지시서 제도의 경우 환자가 병원비 때문에,자녀들을 생각해 어쩔 수 없이 죽음을 선택하는 '강제된 존엄사'가 발생할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대리인에게 사전의료지시서를 작성할 권한을 주는 것,가족이 대리인 역할을 하며 경제적 이유로 환자의 의사에 반하는 결정을 할 수 있는 점,누가 사전의료지시서를 작성할지도 짚어봐야 한다고 꼬집는다.

⊙ 존엄사 판정 구체적 기준 마련해야

회생 가능성이 없다고 의학적으로 판단된 환자의 죽음을 막는 것은 무의미한 고통을 강요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연명치료에 매달려야 하는 가족들의 정신적 고통과 경제적 부담,그에 따른 사회적 비용 또한 만만찮은 실정이다.

더욱이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는 헌법 제10조 규정에 따라 국민들은 죽음을 편안하게 맞이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생명 존중이라는 기본 취지를 최대한 살리면서도 죽음의 주인이 환자 자신이 되도록 도와주는 쪽으로 지혜를 모아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정부와 국회는 품위있는 죽음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서둘러 마련해야 할 것이다.

다만 존엄사 허용이나 법제화가 '현대판 고려장'으로 악용되거나 생명 경시 풍조로 이어지지 않도록 구체적인 기준을 규정하는 등 보완책이 마련돼야 할 것이다.

환자 간병 부담이 한계에 이를 경우 사회적 경제적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시스템도 강구해야 한다.

김경식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kimks5@hankyung.com


용어풀이

안락사(euthanasia)

자연적인 죽음 이전에 생명을 마감시키는 행위를 말하며,모르핀 투여 등 인위적인 행위에 의한 죽음을 의미한다. '적극적 안락사'는 고통스러워하는 환자의 요청에 따라 모르핀 투여 등을 통해 인위적으로 죽음을 앞당기는 행위이고,'소극적 안락사'는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영양공급,약물 투여 등을 중단함으로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을 말한다.

존엄사

품위 있게 죽을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의학적으로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이 임박했을 때 의학적으로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함으로써 질병에 의한 자연적인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전 의료지시서

환자가 자발적 의사 표현을 할 수 있는 상태에서 작성하는 의료유언장으로,미국 · 대만 · 오스트리아 등 여러 국가에서 법제화돼 있다. 서울대병원은 말기 암환자에만 이를 적용하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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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경제신문 5월 22일자 A1면

존엄사를 인정하는 대법원의 판결이 처음으로 나왔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1일 식물인간 상태에 빠진 김모씨(77 · 여) 가족이 세브란스병원을 상대로 낸 '무의미한 연명치료 장치 제거 등 청구소송'에서 인공호흡기 제거를 명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대법원은 "짧은 기간에 사망에 이를 것이 명백할 때는 사망 단계에 진입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며 "치료를 계속하는 것은 인간 존엄성을 해치는 일인 만큼 환자의 의사를 추정해 연명치료를 중단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