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살이 되던 해 박봉의 공무원 생활로는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큰 맘 먹고 돈을 빌려 서울의 한 대학 앞에서 돈가스 전문 레스토랑을 시작했다. 다행히도 장사가 잘돼 3년 뒤 서울 남가좌동에 3층짜리 단독주택을 샀다. 결혼 생활 5년 동안 12번 이사한 뒤 장만한 내 집이었다.

하지만 이듬해 값이 급등한 집을 팔아 장학회를 설립하기로 결심하고 아내를 설득했다. 아내는 "1년 동안 큰 집에서 살아봤고,당신도 장학금으로 학교를 다녔으니 맘대로 하라"며 의외로 선선히 동의해줬다. 장학회를 만들자 주위에서 도와줘 수천명의 후배들에게 혜택을 줄 수 있었다. 이 결정은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됐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어느날 나를 유명 인사로 만들어 국회 진출에 도움을 줬다.

한국전기안전공사 사장으로 취임한 지 어느덧 8개월째다. 돌아보면 12년의 의정 활동보다 더 숨가쁘게 돌아갔다. 부임할 때만 해도 공기업의 방만한 경영과 비윤리성 등을 곱지 않게 봤던 터였다. 막상 업무 보고를 받으면서 많은 오해들이 풀리긴 했다.

하지만 나처럼 대다수 국민들이 갖고 있는 공기업에 대한 오해는 풀어줘야 할 것 같다. 정부의 공기업 선진화와 맞물려 경제위기 상황에서 국민을 돕고 국민의 신뢰를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비전과 성장 동력 창출이 시급했다. 서른 살 시절 레스토랑 운영 수익으로 장학회를 설립해 나 자신을 업그레이드했던 것처럼 공사나 나나 다시 한번 강력한 전환 의지가 필요했다.

그렇다고 공기업의 경영 교과서가 있는 것도 아닌데,무엇을 어떻게 해야 공사를 거듭나게 하고 성공한 CEO가 될 수 있을까. 고민 끝에 기업의 특성에 맞는 고객만족 경영과 윤리 경영을 하면 된다는 결론을 얻었다. 레스토랑 경영처럼 말이다.

우선 '세계 최고의 전기 안전 전문기업'으로 만들자는 비전을 세웠다. 무엇보다 그에 걸맞은 속도가 문제였다. 그래서 레스토랑 손님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빠르고 정성스럽게' 대접하듯 '1초 경영'을 경영철학으로 설정했다. 국민이 원하는 전기안전 서비스를 1초라도 빨리 제공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급변하는 경영 환경에 대응하는 힘을 극대화하겠다는 전략도 깔려 있었다. 그러자면 업무 처리 속도와 경영 효율을 높여야 했다. 먼저 신속한 의사 결정을 위해 조직을 재편하고 회의 시간을 단축했다. 구조조정에도 착수했다.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아 해외 시장 개척에도 적극 나섰다. 그 결과 조금씩 수익이 나아지고 정체된 조직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선진화의 목표는 공공성과 경영 효율을 높여 국민의 사랑을 받는 기업일 것이다. 결국 CEO가 앞장서 비전을 창출하고,임직원 모두 CEO와 함께 고민하며 행동할 때 가능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