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미국 경제지 ‘포천’의 기사 한 토막. “도요타가 렉서스를 미국시장에 출시하는 것은 맥도널드가 ‘비프 웰링턴’(최고급 소고기 요리)을 내놓는 것과 마찬가지다.”

대놓고 내지른 혹평이었다. 미국의 어떤 부자(富者)도 BMW와 벤츠 대신 렉서스를 구입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친철한’ 설명도 덧붙였다. 그러나 곧 상황은 역전됐다. 렉서스는 ‘신화’의 반열에 올랐고 포천의 예측은 조롱거리가 됐다.

현대자동차가 신형 에쿠스를 앞세워 한국판 ‘렉서스 신화’에 도전한다. 국내에서 잘 만들어진 에쿠스 100대를 미국 시장에 내보내 일반 소비자들을 만나도록 한 것. 에쿠스 100대는 미국의 본격적인 자동차 교체 시즌인 가을을 앞두고 현지 주요 딜러 쇼룸에 전시돼 현대차 최고급 승용차에 대한 소비자들의 반응을 체크하게 된다. 실제 판매 여부를 결론지을 최종 테스트인 셈이다.

현대차의 미국 시장 진출은 늘 리스크를 안고 이뤄졌지만 에쿠스 진출이야 말로 창사 이래 최대 모험이라고 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니다. 타도 대상은 독일 벤츠 S클래스와 BMW 7시리즈, 일본 렉서스 LS, 그 가운데서도 최상급 모델이다.

현대차는 에쿠스를 어디에 내놓아도 성능과 품질, 디자인만큼은 뒤지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있다. 다만 브랜드 이미지가 부담이다. 그러나 그것도 제네시스의 훌륭한 론칭으로 극복이 가능하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 이미 지난달 미국 뉴욕 오토쇼에 출품한 에쿠스에 대한 현지의 반응도 꽤 좋았다.

미국 대형승용차 시장 진출의 첨병으로 나서는 100대의 에쿠스가 어떤 결과를 낳을지 주목된다.

◆"에쿠스라면 자신있다"

현대차는 신형 에쿠스에 3년간 5000억원을 투입했다. 1세대 에쿠스를 내놓은 지 10년 만에 모델을 완전히 개선했다. 엔진은 ‘전륜(前輪) 구동’에서 벤츠 BMW와 같은 ‘후륜(後輪) 구동’으로 바꿨다.

후륜 구동 차량은 섬세한 방향 전환이 가능하고 뒷자석 승차감이 좋은 게 강점이다. 구형 에쿠스보다 길이는 40㎜, 폭은 30㎜ 늘렸다. 길이는 벤츠 S클래스, 렉서스 LS와 비슷한 수준이고 폭은 글로벌 명품 차량 가운데 가장 넓다.

지난 3월 에쿠스 신차 발표회장에 모습을 나타낸 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의 얼굴엔 자신감이 가득했다. 평소 말수가 적기로 유명한 정 회장이었지만 이날 만큼은 달랐다. 행사장에 마련된 뷔페 식탁에서 참석자들과 많은 대화를 나눴다.

기자들의 쏟아지는 질문에도 차근차근 대답했다. “신형 에쿠스는 그동안 현대차가 꾸준히 축적해 온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과 철저한 품질관리로 개발한 최고급 대표 차종입니다. 이제 국내 뿐만 아니라 해외에도 본격 진출해 유럽 고급 명차들과 당당하게 경쟁하겠습니다.” 정 회장의 목소리엔 힘이 실려 있었다.

◆제네시스로 간을 보다

현대차는 에쿠스를 미국 시장에 선보이기에 앞서 한 단계 아래 차종인 ‘제네시스’를 먼저 투입했다. 지금까지의 결과는 성공적이다.

제네시스는 작년 8월 본격적으로 판매되기 시작한 뒤 8개월 연속 1000대 이상의 판매 실적을 달성했고 지난 달에는 1470대로 월간 최다 판매량을 기록했다. 세계 유수의 경쟁차에 비해 성능이 떨어지지 않는데다 가격도 라이벌 차량에 비해 1만달러 가량 싸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의 평가도 긍정적이다. 지난 1월엔 미국 디트로이트 코보 센터에서 열린 ‘2009 북미 국제오토쇼’에서 ‘북미 올해의 차’로 선정됐다. 올해 북미에 출시된 50여개 신차와 경쟁해 디자인 안전도 핸들링 주행만족도 등의 측면에서 모두 높은 점수를 받았다.

올해 16회째인 ‘북미 올해의 차’에는 지금까지 일본 자동차 업체도 3번 밖에 선정되지 못했다. 대형차 부문에서는 에쿠스가 아시아 자동차 업계 최초 수상이다. 제네시스는 이어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2009 캐나다 국제 오토쇼’에서도 ‘올해의 차’로 선정됐다.

◆MK의 꿈, 현대제철에서 에쿠스까지

세계 최대의 자동차 왕국을 일구겠다는 정몽구 회장의 꿈은 이제 마지막 두 개의 퍼즐을 맞추고 있다.

하나는 자동차의 기초 소재인 ‘자동차 강판’을 안정적으로 공급받는 것. 이를 위해 지금 충남 당진에선 현대제철이 일관제철소를 짓기 위해 땀을 흘리고 있다. 내년 1월이면 첫 쇳물이 쏟아진다.

두 번째 과제는 중저가 브랜드 뿐만 아니라 최고급 차종에서도 현대차의 기술력을 인정받는 것. 에쿠스가 미국 시장 진출을 시도하는 이유다. 에쿠스만 성공하면 현대차는 명실상부한 ‘풀 라인업’ 메이커가 된다. 정 회장의 꿈이 마지막 시험대에 오른 것이다.

◆렉서스냐, 페이튼이냐

에쿠스가 렉서스처럼 성공가도를 달릴 수 있을까. 시장의 평가는 아직 유동적이다. 에쿠스의 성능이나 가격은 경쟁력이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2%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블룸버그통신은 최근 전문가들의 견해를 인용, “프리미엄 차량은 자동차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며 “에쿠스가 반짝 인기를 끌 수는 있지만 총체적인 브랜드 관리에 실패하면 소비자들이 곧 떠나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자칫 폭스바겐의 ‘페이튼’ 신세가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페이튼은 출시 첫 해인 2003년 2000대 가량 팔리며 각광을 받았지만 곧바로 소비자들의 외면을 받기 시작, 2007년엔 판매량이 17대로 급감했다.

에쿠스의 ‘척후병’에 해당하는 제네시스가 지금까지는 미국 소비자들의 환영을 받고 있지만 이런 성공을 현대차에 대한 미국 소비자들의 인식 변화로 해석하기는 아직 이르다는 견해도 적지 않다.

플로리다에서 현대차 딜러로 활동하고 있는 릭 케이스는 “작년 하반기 이후 제네시스를 찾는 고객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제네시스란 브랜드가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경기불황으로 까칠해진 주변 시선을 의식한 미국 고소득층이 벤츠나 BMW처럼 눈에 띄는 브랜드를 기피하는 바람에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제네시스가 반사이익을 누렸다는 얘기다.

이에 대해 현대차 관계자는 “신형 에쿠스는 개발 초기부터 외국시장을 겨냥한 모델”이라며 “일단 중국 시장에 주력한 뒤 반드시 미국 시장 공략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한경닷컴 안재석 기자 yago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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