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창근 논설실장 kunny@hankyung.com >

종교적 신념이 아니더라도 생명경외(生命敬畏)는 보편적인 선(善)이고 마땅히 존중되어야 할 가치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지난주 대법원은 도롱뇽의 생태계 보호를 위해 경부고속철도 천성산 터널공사를 방해한 혐의로 기소됐던 지율 스님의 유죄를 확정했다. 법 정신의 우선적인 가치가 공공의 이익에 있음을 다시 입증해 준 판결이다.

환경에 대한 논의는 그 자체가 인간의 질 높은 삶을 위한 것인데도 대개의 경우 공공의 이익과 충돌하는 것은 아이러니다. 이번 '도롱뇽 재판'과 유사한 사례는 오래전 미국에서도 있었다. 1970년대의 '물고기 판례'다. 테네시강에 사는,우리나라 은어와 비슷하게 생긴 시어(矢魚 · snail darter)라는 물고기가 있었는데,당시 거의 멸종상태였고 생태학적으로도 별로 의미 있는 존재는 아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물고기의 서식지 보호를 위해 댐 건설을 막으려는 소송에서 미국 법원은 물고기 편을 들어주었고,결국 값싼 전력생산을 위한 수력발전소 건설이 오랜 기간 지연됐다.

따지고 보면 수십억년 전 지구가 생성되고,생물체가 출현한 이래 수없이 많은 동물과 식물이 인간의 자연파괴 이전에 이미 스스로 멸종되고 사라졌다. 중생대 1억몇천만년 동안 지구를 지배했던 공룡의 멸종 또한 그렇다.

아마도 인류가 존재한 몇백만년 동안 이 땅에 살았거나 지금 살고있는 모든 종(種)보다 더 많은 생물의 종류가 인간이 나타나기 전에 이미 소멸됐을 것이다. 그것이 자연과 환경,생태계가 변화하고 진화하는 과정의 일부다.

인간은 역사 이래 줄곧 자연을 파괴해 왔다. 보다 안전한 삶을 위해 수많은 동 · 식물의 생존을 위협하고,늘어나는 인구가 먹을 식량을 얻기 위해 더 많은 땅을 개간하고,풍요로운 생활을 위해 재생가능 여부와 관계없이 더 많은 자원을 캐내고 소비해야만 했다.

그 자체가 인류의 문명발전 과정이었고,자연과 환경을 훼손하고 파괴함으로써 지금까지 인간의 생존이 가능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럼에도 많은 환경론자들은 인간이 더 나은 생활을 위해 자연을 개발하는 행위가 자연에 대한 공격이며,결국 인류 자신에 대한 파괴행위라고 주장한다.

자연은 완전하지만 인위적인 것은 불완전하다는 착각,자연은 있는 그대로 보전되는 것이 최선이라는 독단(獨斷)에 지배되고 있다.

하지만 자연은 인간의 풍요로운 삶을 위한 수단을 결코 완전한 형태로 제공하지 않는다. 태양이 없으면 거의 모든 생물이 존재할 수 없지만 태양에서 방출되는 자외선은 치명적 질병인 피부암을 일으킨다. 그런 양면성의 틈새에서 기아와 질병의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식량을 증산하고 주변 물질로부터 의약품을 합성하며 땅에 묻힌 자원을 파내 요긴하게 활용하는 기술의 개발,인류 생활을 획기적으로 바꾼 전기와 통신,교통수단의 발명…이 모든 걸 이뤄낸 것은 인간의 지혜였다. 자연을 보다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이용하고,자연의 위험을 회피하는 방법을 찾아온 과정이 인간이 살아온 역사인 것이다.

몇 해 전 광주광역시의 풍광 좋은 무등산 자락에 위치한 조선대 교수 한 분이 흥미로운 조사를 한 적이 있다. 학교 구내의 자연방사선 준위를 측정해본 결과 부근 영광 원자력발전소 주변보다 훨씬 높게 나타난 것이다. 이 방사선이 방출되는 곳은 다름 아닌 학교 풍광에 한몫하고 있는 자연 암석들이었다. 원전이 위험하다는 환경론자들의 논리대로라면 학교가 훨씬 더 위험한 곳이라는 얘기다. 물론 실제로는 전혀 위험하지 않다.

과거에 그랬듯 미래에도 인간은 지속적으로 자연을 파괴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더 맑은 물과 공기를 마시기를 원한다. 환경보전은 그래서 자연을 그대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보다 안전하게 개발하는 방법을 어떻게 찾느냐의 문제다. 이번 도롱뇽 판결의 의미 또한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