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8일 밤 9시 서울 서초구 서초동 대법원 기자실.TV를 지켜보던 기자들이 KBS '9시뉴스'의 헤드라인을 보고 일제히 웅성거렸다. "대법원이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헐값 발행 의혹'(삼성사건)에 대해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에게 무죄를 선고키로 결론내렸다"는 내용이 보도됐기 때문이다.

앞서 이날 오후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삼성사건에 대한 재판을 열고 다음 달 29일 판결을 내리기로 합의했다. KBS가 한 달가량 남은 재판의 결과를 미리 예측해 보도한 셈이었다. KBS는 이에 더해 "유전무죄 무전유죄,법원의 재벌 봐주기 판결 논란은 더욱 격화될 전망"이라며 법원에 대한 비판도 잊지 않았다.

기자들은 일단 사실 확인에 나서면서도 언론 사상 전무후무한 '판결 예보'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한 기자는 "법조기자 7년 동안 판결도 나기 전 기사를 쓴 것은 처음 본다. 판결에 영향을 끼치겠다는 심산인가"라며 강한 불만을 터뜨렸다. 기자들 모두가 "심각한 언론윤리 위반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한국신문윤리위원회의 '신문윤리실천요강' 제4조에서는 "기자는 판결문,결정문 및 기타 사법문서를 판결이나 결정 전에 보도 · 논평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오석준 대법원 공보관은 보도가 나오자마자 즉각 "무죄 선고키로 했다는 것은 사실무근이고 KBS의 보도행태는 언론의 기본을 저버린 한심한 행위"라는 비난 섞인 공식성명을 냈다.

KBS 측은 다음 날 "분명 적절치 못한 걸 알고 있었다"고 인정하면서 "보도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고 해명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특종보도의 유혹을 참아내며 보도와 관련한 언론윤리를 지키려고 노력해 온 많은 기자들에게는 허탈감만 남았을 뿐이다.

KBS는 지난달 신영철 대법관의 '촛불재판 판결 독촉 이메일 발송'을 보도했다. 신 대법관이 지난해 말 서울중앙지방법원장으로 재직할 당시 판사 10여명에게 촛불재판 판결에 대해 "현행법에 따라 결론을 내달라"고 이메일을 보내 메일을 받은 일부 판사들이 압력으로 느꼈다는 내용이었다.

신 대법관이 만약 다음 달 29일 있을 판결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 '9시뉴스'를 봤다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기 눈의 대들보는 못 보면서도 남의 티끌만 보는 KBS 보도에 대해 쓴웃음을 짓지 않았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