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정복기.소가 넘어갔다. 군대 가는 날의 아침 풍경.아버지의 애인.밤 두시 종삼에서 들은 호랑이 울음….' 알쏭달쏭한 이 글은 '별들의 고향''상도' 등을 집필한 소설가 최인호씨가 또박또박 써내려간 창작메모다. 어떤 작품의 토대가 됐는지는 알 수 없으나 작가의 머릿속에서 번뜩이던 상상력의 일단을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마음이 스산할 때의 눈은 자장가와 같다. 그리고 하얗게 쌓인 눈은 온갖 더러움을 씻어낸 다음의 포근한 안식을 상징하는 것도 같다. 그러나 이렇게 써놓고 보니 쑥스럽기 짝이 없다. 그야말로 진부한 상투어가 아닌가….'이는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로 시작되는 시 '낙화'를 남기고 2005년 타계한 이형기 시인의 시작(詩作)노트다. 한 편의 시가 탄생하기까지 얼마나 치열한 탐구와 자기반성이 있는지를 엿볼 수 있게 한다.

문인들의 육필(肉筆)원고와 초고를 한 자리에서 보여주는 '창조의 발상-초고와 육필원고'전이 서울 종로구 평창동 영인문학관에서 열리고 있다. 황순원 김동리 김상옥 박경리 이청준 등 작고작가 16명을 비롯 박완서 조정래 오정희 이문열 김훈 등 문단의 한 획을 그은 문인 70여명이 직접 손으로 쓴 원고를 볼 수 있는 드문 기회다.

지금은 컴퓨터로 글을 쓰는 작가들이 많지만 육필원고가 주는 느낌은 색다르다. 곳곳에 고친 흔적이 남은 초고,원고지에 한자 한자 써 넣은 최종원고,작품을 구상한 창작메모 등에는 작가의 혼이 고스란히 스며 있다. 조정래 같은 작가는 손으로 써야 글의 맛이 살아난다며 방대한 분량의 대하소설까지 육필을 고수하고 있기도 하다.

김동리와 김상옥 두 작가의 집필실을 재현해 놓은 공간도 눈길을 끈다. 앉은뱅이 책상위에 단정하게 놓인 한지와 벼루,자그마한 찻상위의 흰 찻잔 등에서는 짙은 문기(文氣)가 풍긴다.

대다수 작가들은 작품을 한 편 끝내면 해산한 것 같이 보람과 허탈함을 동시에 느낀다고 한다. 창작이 기쁨이면서 고통이라는 말도 그래서 나왔을 것이다. 어떤 작가는 한 문장의 쉼표를 어디에 찍을까를 놓고 밤을 꼬박 새울 정도로 혼신의 힘을 쏟기도 한다. 효율과 결과만을 중시하는 요즘,우리나라 대표작가들의 땀이 밴 육필원고에서 '창작 과정의 소중함'을 되새겨 보면 어떨까.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