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애인은 잘해주는 사람이다. 더 좋은 애인은 잘해주는 티를 내지 않는 사람이다.

공기나 물처럼.국가도 마찬가지이다. 좋은 국가는 국민을 잘 보호해주는 국가이지만,더 좋은 국가는 평소에는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느낄 수 없는 국가이다. 최상의 정치가 정치 같지 않은 정치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어떤 것의 진가는 위기일 때 드러난다. 영원히 존재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애인이나 국가가 좋은 줄 어찌 알겠는가. 애인이건 국가건 없어봐야 그 가치를 통감할 수 있다. 특히 한국인들처럼 민족의식이나 국가관이 투철한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최근에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다섯 번이나 맞붙은 한 · 일야구전에 대한 반응이나,피겨스케이팅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김연아 선수를 응원하는 태도에서 국가 이데올로기가 여전히 작동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일본은 꼭 이기고 싶었기에 이긴 후에는 너무 좋아 마운드에 태극기를 꽂는다. 김연아 선수가 연습할 때 방해를 받았다는 경쟁 상대는 실명이 거론되지 않았어도 괜히 일본선수일 것 같은 '심증'이 생긴다. 그렇게 믿고 싶기 때문이다. 일본도 만만치 않다. '사무라이 재팬'(일본 야구 대표팀의 애칭)의 목표는 '한국 타도'였고,한국전에서 초기에 부진했던 이치로 선수는 '전범'으로 불렸다. 이 것은 더 이상 스포츠만의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이런 국가 이데올로기가 국민 개개인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사실이다. 플라톤은 "국가도 인간과 다를 것이 없다. 국가도 인간의 갖가지 성격에서 만들어진다"고 했다. 당신이 바로 국가인 것이다. 국가가 개인의 삶을 결정하기보다는 개인에 의해 국가의 운명과 수준이 결정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최근 출간된 이응준의 장편소설 '국가의 사생활'은 제목부터 문제적이다. 국가 자체가 개인으로 이루어졌기에 국가도 사생활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국가가 더 이상 공적(公的) 지위를 상실했기에 사적(私的) 영역에 속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것은 이때의 국가가 남북통일이 된 '하나'의 조국을 지칭한다는 것이다.

이 소설에 의하면 2011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흡수 통일한 이후 남한의 상황은 한마디로 엄청난 지옥이자 디스토피아이다. 통일이 되어도 남한과 북한은 더욱 분리되고 대립한다. 이 소설의 날카로운 점은 이처럼 통일에 대한 낭만적 환상을 거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 다음처럼 북한사람은 뼈아프게 지적한다. "넌 통일 이후의 대한민국이 우리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생각해? 그건 이남 사람들의 착각일 뿐이야.여긴 원래 이랬어.그게 통일 때문에 극심해져서 확연히 드러난 것뿐이지."

나쁜 것은 통일 이후의 불행에 대해 북한 탓만 할 수 없다는 점이고,더 나쁜 것은 개인의 불행을 국가 탓으로만 돌릴 수 없다는 점이다. 개인이 곧 국가이니까. 그래서 이 소설은 공도동망(共倒同亡)의 위기에서 유일한 희망을 각 개인들이 만들어내는 변화에서 힘겹게 찾고 있다. 사소한 개인이 국가를 강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탈북자는 이제 한국 사회의 대표적인 소수자이다. 워싱턴포스트지가 4월12일자로 보도한 바에 의하면 현재 일주일에 평균 약 35명의 탈북자가 한국에 입국하고 있으며 1만5000명의 탈북자들이 한국에 정착했다. 그들의 꿈이 북한에 두고 온 가족들과 함께 따뜻한 쌀밥을 먹는 것이기에,생일잔치를 해주면 가족 생각에 죄의식을 느끼며 눈물을 흘린단다.

로켓을 발사하고 6자 회담을 거부하는 북한의 '사생활'은 이토록 처절하고 부도덕하다. 우리에게는 이런 탈북자들 개인이 곧 북한이라는 국가이다. 통일 이후에 원망을 듣지 않고 부끄럽지 않으려면 더욱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