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물은 청동기시대부터 있었습니다. 로마시대에도 맨홀 뚜껑이 있었다고 하니까요. 그만큼 오래된 기술인 셈이죠."

지난 15일 충북 청원군 남이면 척산리.새까만 원형 맨홀 뚜껑 수백 개가 진열돼 있는 주물전문업체 일산금속 본사 안마당을 지나 공장 안으로 들어서자 후끈한 불기운이 느껴졌다.

주물의 역사를 이야기하던 이상종 대표(50)가 "불똥이 튀니 조심하라"며 한눈을 팔던 기자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입구 바로 안쪽에 있던 반팔 차림의 인부들이 전기도가니를 크레인으로 이동시켜 네모난 샌드위치처럼 생긴 주형틀에 쇳물을 부을 참이었다. 오렌지색 쇳물이 주형틀 모서리에 난 조그만 구멍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잿빛 수증기가 '치이익'하고 솟아 올랐다.

"석고상을 뜨듯 특수모래로 맨홀 뚜껑 틀을 만든 뒤 그 빈 공간에 쇳물을 붓는 작업이죠.붕어빵 만드는 원리와 같다고 보면 됩니다. "(김기억 부사장)

1958년 설립된 일산금속은 충북 청원에 본사를 둔 직원 50명의 지역 주물업체.하지만 도로설비용 주물제품에 관한 한 국내 최고의 기술력을 자랑하는 맨홀 뚜껑 전문업체다. 충북지역은 물론 전국 각지에 주물 맨홀뚜껑,철제 가로등주(기둥) 등을 공급,연간 100억~120억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이 중 절반이 맨홀 뚜껑에서 발생한다. 맨홀 뚜껑 하나가 20만~30만원(30㎏ 기준) 정도임을 감안하면 연간 3만개 정도의 일산금속산(産) 맨홀 뚜껑이 전국 도로에 깔리고 있는 셈이다.

맨홀 뚜껑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한 도로설비.그렇다고 누구나 쉽게 만들 수 있는 제품은 아니라는 것이 2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이 대표의 지적이다. 그는 "회사가 보유한 28개의 특허 중 맨홀 뚜껑으로만 받은 것이 15개"라고 자랑했다.

대표적인 제품이 잠금장치를 장착한 맨홀 뚜껑.스프링 장치가 내장돼 있어 한번 닫아두면 일부러 열기 전까지는 자동차바퀴가 위로 지나가도 덜커덩거리는 시끄러운 소리가 나지 않고 잘 빠지지도 않는다. 이 대표는 "조달청 우수제품으로 인증받는 등 인기가 높다"고 귀띔했다. 최근에는 아예 현장에서 콘크리트를 비벼 넣을 필요 없이 맨홀과 맨홀뚜껑을 일체화해 장난감 블록처럼 끼워넣을 수 있도록 만든 맨홀세트도 개발,사용 편의성을 높였다.

지금은 전국에서 알아주는 유망중소기업으로 성장했지만 일산금속의 시작은 미미했다. 창업주 이철우 회장(2005년 작고)은 원래 청주기계공고 기술과 교사였다. 하지만 6형제의 장남이다 보니 가족 부양을 위해 교단을 포기하고 1958년 일산금속을 세웠다. 일제 강점기 때 중국인 기술자의 어깨너머로 배웠던 주물기술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호구지책이 된 것.이 대표는 "소 한 마리를 판 게 밑천이 됐고,동네에서 끌어모은 청년 5명이 창업멤버였다"고 전했다.

회사가 처음 만들어 판 것은 맨홀 뚜껑이 아닌 쟁기,무쇠솥 같은 농기구와 생활용품이었다. 일종의 대장간 같은 가내수공업체였던 셈.하지만 국내 생산단가가 일본보다 훨씬 싸다 보니 1960년대 후반에는 모터부품 같은 작은 기계부속을 제작해 일본업체에 넘기는 등 수출 역군 노릇도 했다. 1970년대에는 아예 무거운 맨홀 뚜껑 완제품까지 수출하기도 했다.

매출이 많아야 1억원도 채 되지 않던 회사가 덩치를 수십 배로 불릴 수 있었던 계기는 1986년 개최된 아시안게임과 함께 찾아왔다. 콘크리트 재질로 볼품없었던 맨홀 뚜껑이 불만이었던 정부가 대대적인 도로정비에 나서면서부터다. 아름답게 디자인된 철제 맨홀 뚜껑 수요가 폭증한 것이다. 한번 입소문을 타 궤도에 오른 회사는 1998년 외환위기 당시에도 매출이 90억원대를 유지할 정도로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하지만 1999년 사업다각화를 위해 손을 댔던 환경사업에 실패하면서 생존의 갈림길에 서기도 했다. 하수종말처리장 슬러지 소각로를 개발한다며 당시 매출의 3분의 1인 30억여원의 자금을 쏟아부은 것이 수포로 돌아가고 만 것.설상가상으로 보증을 서 줬던 친척 회사가 망하면서 30억원의 빚까지 떠안게 됐다. 회사 창립 이래로 최악의 사태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1984년 군 제대 후 "잠깐만 도와달라"는 부친의 권유로 입사했던 이 대표가 기획실장을 거쳐 사장에 취임한 것이 이때였다. 만신창이가 된 회사를 수습해 달라는 아버지의 간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청주대 법대를 나온 이 대표는 고시공부를 하려던 당초 계획을 접고 영업망 재건과 판촉활동에 나서야 했다. 아침 6시에 출근,새벽 1~2시에 퇴근하는 일이 이어졌다. 그는 취임 5년 만인 2005년에서야 60억원의 빚을 모두 갚고 회사를 정상화할 수 있었다.

이때 빚 청산과 함께 병행한 것이 기술개발.주물업체로서는 드물게 자체 연구소를 설립하고,매년 매출액의 3~4%에 가까운 돈을 연구개발비로 지출했다. 이는 업계 평균(1%)의 3배가 넘는 규모다. 이를 통해 얻어낸 성과 중 하나가 감전방지용 주물 가로등주.회사는 올해 안에 제품을 시장에 선보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는 굴뚝산업이라는 인식이 강한 주물업의 미래를 누구보다 확신하고 있다. 기술 혁신이 있는 한 밝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다. 특히 부가가치가 높은 정밀주조는 앞으로도 잠재력이 크다는 것.이 대표는 "항공기, 자동차, 조선 등에 필요한 혁신적인 부품제조 기술을 축적하는 데 회사의 모든 역량을 쏟아붓겠다"고 강조했다.

청원=이관우 기자 leebro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