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권의 부실채권을 사들여 처리하는 민간 배드뱅크 설립 작업이 난관에 부딪쳤다. 자본확충펀드를 받아 배드뱅크에 출자하려는 움직임에 금융위원회가 제동을 걸고 나섰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이달 중 출범 예정이던 민간 배드뱅크는 자본금 규모도 당초 계획보다 줄고 설립 시점도 하반기 이후로 늦춰질 것으로 예상된다. 배드뱅크는 금융사의 부실채권을 사들여 처리하는 일을 전담하는 별도의 회사를 말한다.

시중 은행 고위 관계자는 15일 "금융위에서 최근 은행들이 자본확충펀드에서 지원받은 돈을 꺼내 바로 배드뱅크에 출자하는 것은 안 된다는 방침을 통보했다"며 "자본확충펀드를 이용할 수 없을 경우 은행당 수천억원에 달하는 출자금을 별도로 마련해야 하기 때문에 어려움이 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금융위 관계자도 "자본확충펀드는 은행들이 열심히 구조조정을 하는 과정에서 손실이 발생할 경우 이를 메워주기 위해 만든 것이지 배드뱅크에 출자하라고 준 돈이 아니다"고 말했다.

당초 금융위는 은행이 자본확충펀드로 조달한 자금을 민간 배드뱅크에 출자해도 괜찮다는 입장이었다. 자본확충펀드의 목적 가운데 '구조조정 지원'이 규정돼 있는 만큼 부실채권을 처리할 배드뱅크에 출자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해석이었다. 이에 따라 이백순 신한은행장은 지난 1일 기자회견에서 "민간 배드뱅크 출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자본확충펀드 지원을 받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민간 배드뱅크에 사실상의 공적자금인 자본확충펀드를 투입하는 데 따른 논란이 일자 입장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 배드뱅크가 은행 돈이 아닌 공적자금 성격의 자본확충펀드를 재원으로 할 경우 높은 가격으로 부실채권을 사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또 은행들이 현물출자 형태로 민간 배드뱅크를 만든다면 자산 매각에 따른 유동성 증가가 없어 대출 여력 증대에 도움이 안 된다는 지적도 나왔다.

은행들은 당초 자본확충펀드에서 지원받은 돈으로 배드뱅크 출자금을 마련,이달 설립 작업을 끝내고 오는 6월부터 부실자산 매입에 나선다는 계획이었다. 부실채권을 적정한 가격에 팔기 위해 자산관리공사(캠코)와 경쟁할 곳을 만들겠다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자본확충펀드를 활용할 수 없어 민간 배드뱅크 설립이 지연될 것으로 전망된다. 자본금도 3조원에서 크게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은행들이 자본확충펀드 외에 출자 여력이 별로 없는 데다 국민연금 등도 이해상충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며 투자에 난색을 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부실채권의 평가 기준을 마련하거나 인력을 파견하는 문제 등 실무적 사안들을 놓고 은행들의 이견을 조율하기가 어렵다는 점도 민간 배드뱅크 설립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부실채권을 많이 가진 은행과 적게 가진 은행,대형은행과 중소은행 간 갈등이 생길 수 있고,부실채권이 많은 대형은행이 민간 배드뱅크를 주도할 경우 중소 은행과 부실채권이 적은 은행들이 손실을 입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김현석 기자 reali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