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호 기자의 '말짱 글짱'] 우리 곁에 돌아온 ‘노들섬’
지난 3월2일 서울시청 브리핑실에 오세훈 시장이 들어섰다.

"오늘 저는 한강 노들섬에 들어설 세계적인 문화예술공연장의 새 이름과 밑그림이 확정됐음을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중략) 공연장을 넘어 노들섬 전체를 문화예술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낭만적이고 즐거운 축제가 열리는 공간의 이미지를 담았습니다."

그동안 우리 기억 속에서 잊혀져가던 한강의 노들섬이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오게 됐다.

서울시에서 노들섬을 대규모 복합문화예술 공간으로 개발한다는 소식과 함께다.

노들섬은 한강이 품고 있는 여러 섬 가운데 하나이다.

지금은 황량한 갈대숲과 모래더미 위에 테니스장만 덩그러니 남아 있어 사람들의 접근이 어려웠던 곳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그냥 노들섬이라 하면 어디에 있는 섬인지 모르는 사람도 많은 것 같다.

노들섬뿐만 아니라 우리에겐 '노들강변 봄버들,휘휘 늘어진 가지에다가~'로 시작하는 민요 속의 '노들강변'도 마찬가지다.

노랫말을 통해 너무도 익숙한 말이지만 막상 노들강변이라고 하면 도대체 어디를 가리키는 곳인지, 그런 데가 있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

노들섬은 서울시 용산구 한강로 3가와 동작구 노량진을 연결하는 한강대교 밑에 있는 섬이다.

그 한강대교 남단에서 영등포 쪽으로는 노들길이 이어진다.

한강대교는 일제강점기 때인 1917년 한강에 놓인 1호 다리로 건설됐다.

당시 일제는 이 다리를 놓으면서 북단 쪽의 모래언덕에 흙을 돋워 타원형으로 만들어진 섬에 중지도(中之島)란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이후 1995년 정부에서 추진한 일본식 지명 개선사업에 따라 비로소 지역 연고에 맞는 '노들섬'이란 이름으로 바뀌었다.

지금도 노들섬의 예전 이름 '중지도'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은 것은 그런 까닭이다.

한강을 사이에 두고 용산의 맞은편을 예부터 노들 또는 노돌이라고 했다.

'노들'의 사전적 풀이는 '서울 한강 남쪽 동네의 옛 이름. 지금의 노량진동'이다.

이 지역은 예부터 수양버들이 울창하고 경관이 빼어나 일찍부터 시인묵객이 많이 다녀가는 곳이었다.

한강은 이곳에서 '노들강'이 된다.

일설에는 이 '노들(노돌)'은 '백로(鷺)가 노닐던 징검돌(梁)'이란 뜻에서 이처럼 불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조선 태종 14년(1414년) 이곳에 나루(津)를 만들어 노들나루란 이름이 퍼지게 됐다.

'백로가 노니는 징검돌이 있는 나루'를 한자로 옮긴 게 '노량진(鷺梁津)'이다.

동작구 노량진1동 주민센터에서도 홈페이지를 통해 동 이름의 유래를 이처럼 전하고 있다.

노량진을 우리 고유의 말로 적으면 '노들나루'가 되는 셈이다.

노량진을 지금 와서 새삼 노들나루로 바꾸기도 힘들고 그럴 필요도 없겠지만 고유 지명에 담긴 감칠맛 나는 정서는 우리가 지키고 가꿔가야 할 문화유산임에 틀림없다.

경기 용인 지역에서 발원해 한강으로 흘러 들어오는 '탄천'도 본래의 토박이 이름을 잃고 딱딱한 한자어로 대체된 경우다.

탄천은 서울 강남구 일원동에서 양재천과 만나 올림픽 주경기장 옆에서 한강으로 합류한다.

지금은 탄천이라 불리지만 본래는 숯내,검내 등으로 불렸다.

조선시대 강원도 등지에서 목재와 땔감을 한강을 통해 싣고 와 건너편 뚝섬에 부렸는데,이걸 갖고 숯을 만든 곳이 바로 탄천 부근이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개천 물도 검게 변했다고 하는 데서 숯내 또는 검내로 불렸다고 한다.

이를 한자어로 옮긴 게 '탄천(炭川)'이다.

숯내나 검내는 어감도 부드럽고 말 속에 옛 정서와 문화가 살아 있으나 탄천은 한자를 함께 익히지 않는 한 무슨 말인지 알 도리가 없다.

탄천과 양재천이 만나는 한강 갈대밭 부근은 '학여울'이다.

'여울'은 '강이나 바다의 바닥이 얕거나 폭이 좁아 물살이 세게 흐르는 곳'을 가리키는 우리 고유어이다.

그러니 '학여울'은 학이 노닐던 여울이란 뜻이다.

대동여지도에는 '학탄(鶴灘)'으로 전하는데,'여울'을 한자로 옮긴 게 '탄(灘)'이다.

서울 지하철 3호선을 타고 가다보면 강남구 대치동에 있는 '학여울역'은 이 '학탄'을 고유어로 푼 것이다.

딱딱하고 정체 모를 '학탄역'보다는 '학여울역'이란 이름이 훨씬 맛깔스럽고 쉽게 다가온다는 것은 누구나 느낄 수 있다.

그것이 고유어를 살리려는 노력이 필요한 이유다.

한국경제신문 기자 hymt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