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의 최측근인 이광재 민주당 의원이 최근 의원직 사퇴와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그를 벼랑 끝으로 몬 건 다름아닌 각종 비리의혹이었다. 한때 그는 노 전 대통령의 오른팔이라는 평을 들었던 실세였다. 그게 문제였다. 검찰에서 십여 차례나 조사를 받았다. 그간 아슬아슬하게 구속을 피했지만 이번 '박연차 리스트'수사를 빠져나가지는 못했다. 정계를 떠나기로 한 그는 이제 46세다. 어쩌면 은퇴가 아니라 정치를 막 시작해야 할 나이에 비리의 사슬로 낙마한 것이다.

불법 정치자금 문제는비단 이 의원에게 국한된 얘기는 아니다. '박연차 리스트'에 오른 국회의원만도 10여명에 달한다. 한나라당의 차기 기대주인 박진 의원과 서갑원 민주당 의원이 이미 검찰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 앞으로도 의원들의 줄소환이 예상된다. 의원 몇 명은 이 의원과 비슷한 처지에 놓일 가능성이 높다.

이렇듯 불법 정치자금 문제는 뿌리가 깊다. DJ정권은 물론 YS정권 때도 있었다. 그 이전 정권 때도 예외는 아니었다. 우리 정치의 구조적인 문제인 셈이다. 오죽하면 "내가 교도소 담장 위를 걷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다"는 얘기가 나왔을까. 과거 여권의 실세 중진이 불법정치자금 수수혐의로 구속되면서 한 이 말은 돈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한 우리 정치인들의 현 주소를 대변한다.

정치인에게 정치자금은 필수적이다. 사무실 운영비에 인건비,정책 자료집,의정보고서,경조사비,여기에 품위유지비까지 온통 돈 들곳이다. 문제는 고비용 정치 구조 아래에서 돈은 필요한데 조달이 여의치 않다는 점이다. 과거 같이 줄만 잘 서면 챙길 수 있는 '눈 먼 돈'도 없어진 터다. 한 발만 헛디디면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 있다는 걸 잘 알면서도 검은 돈의 유혹에 쉽게 빠져드는 이유다. 현실과 한참 동떨어진 정치자금법도 범법자 양산과 무관치 않은 게 사실이다.

그렇다고 정치인들을 옹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의원 비리는 결국 초심을 잃은 결과라는 점에서다. 정치를 시작하면서 구태부터 생각하는 정치인은 없다. 깨끗한 정치와 새로운 정치를 꿈꾼다. 적어도 더러운 돈을 받아먹고 구속된 선배들의 전철은 절대 밟지 않겠다는 다짐을 몇 번은 했을 것이다. 이런 초심만 간직했더라면 정권이 바뀔 때마다 사정의 칼날에 의원들이 줄구속되는 악순환의 고리는 벌써 끊어졌을 것이다.

우리 정치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부정한 돈의 달콤한 유혹은 집요하다. 선수(選數)가 쌓이고 힘이 세지면 유혹의 강도도 더 세진다. 정치적 성공을 위한 도약을 꿈꾸다보면 돈 쓸 구멍은 점점 더 넓어진다. 이게 부정한 돈이 끼어드는 틈새다. 불법정치자금 문제로 구속된 정치인 중 대선주자급 중진들이 적지 않았다는 게 이를 방증한다.

정치인들이 달콤한 유혹에 빠지는 건 대체로 두 가지 자기합리화에서 기인한다. 하나는 "다 받는데 문제가 되겠어.재수없는 케이스가 나는 아닐 거야"라는 집단적 동류의식에 따른 막연한 자신감이다. 두 번째는 후원금과 뇌물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점을 의식한 "이건 대가성이 없는 후원금이야"라는 자기 최면이다. 이 두 가지가 마음 속에 떠오르는 순간 그 정치인은 이미 교도소 담장 위에 서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