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호 기자의 '말짱 글짱'] 넝쿨장미의 하소연 “내 이름도 불러줘요!”
# 다음 먹잇감은 미국의 대형 부품회사다. 그는 현재 이들 기업이 무너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GM,포드가 추락하면서 가만히 있어도 호박이 덩쿨째 굴러들어올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몇 해 전 미국의 월스트리트 저널은 쓰러져 가는 기업을 사들여 이를 되파는 방식으로 억만장자의 반열에 오른 기업 사냥꾼 윌버 로스의 움직임을 자세히 전했다.

그런데 여기 쓰인 '호박이 덩쿨째 굴러들어오다'는 말은 어딘지 이상하다.

덩쿨? 덩굴? 넝쿨? 덤불? 아쉽게도 우리말에 '덩쿨'이란 말은 없기 때문에 옥에 티가 됐다.

이때는 넝쿨 또는 덩굴이다.

'덩굴'은 길게 뻗어 나가면서 다른 물건을 감기도 하고 땅바닥에 퍼지기도 하는 식물의 줄기를 이르는 말이다.

'넝쿨'도 같은 말이다.

'수박 덩굴/찔레 넝쿨/덩굴을 뻗다/뒤엉킨 넝쿨 더미' 식으로 함께 쓰는 말이다.

물론 덩굴이나 넝쿨은 복수표준어이므로 서로 바꿔 쓸 수 있다.

사람에 따라 덩굴과 넝쿨의 중간 형태인 '덩쿨'을 쓰기도 하는데 이는 이도저도 아닌 틀린 말이다.

우리말 체계에서 넝쿨과 덩굴만 단어로 수용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 '-장미'가 붙으면 경우에 따라 말의 격이 달라진다.

장미과의 관목 중에 줄기가 곧게 서지 않고 다른 물건을 감거나 거기에 붙어서 자라는 종류가 있다.

5월께면 학교나 아파트 담 벽을 타고 또는 울타리를 휘감으며 화사한 자태를 뽐내는 모습을 보게 될 이 꽃 이름을 두고 어떤 이는 덩굴장미라 하고 다른 사람들은 넝쿨장미라 부르기도 한다.

덩굴이나 넝쿨이나 같이 쓰는 말이므로 이 역시 어찌 불러도 상관없으리라 여겼다간 오산이다.

우리 규범은 이를 '덩굴장미' 하나만 인정하기 때문이다.

넝쿨장미는 '규범'이란 이름에 의해 버림받은 셈이다.

그래서 <표준국어대사전>에서도 넝쿨장미는 '덩굴장미의 북한어' 정도로 취급받고 있을 뿐이다.

실제로 북한의 문화어(우리의 표준어에 해당한다)에선 덩굴장미와 넝쿨장미를 함께 인정하고 있다(또는 '줄장미'라고도 한다).

덩굴장미뿐만 아니라 고구마나 완두,오이,나팔꽃,담쟁이덩굴,칡,포도나무 따위는 모두 줄기가 다른 무엇에 의지해 자라는 덩굴성이다.

이들을 통틀어 덩굴식물이라 한다.

물론 덩굴이나 넝쿨이나 함께 쓰는 말이므로 당연히 '넝쿨식물'이라 해도 된다.

우리말에서 복수표준어 규정은 두 개의 말이 다 같이 널리 쓰이면 이를 모두 표준어로 인정한다는 뜻이다.

소고기/쇠고기,노을/놀,시누이/시누,네/예(대답하는 말),꺼림칙하다/께름칙하다,여태/입때,거슴츠레/게슴츠레,구린내/쿠린내,떨어뜨리다/떨어트리다 등 이런 정신이 반영돼 함께 쓸 수 있는 말이 상당히 많다.

그런 점에서도 유독 넝쿨장미가 단어로 대접받지 못하고 홀대받는 것은 표준어 사정에 일관성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만하다.

우리 속담에 '호박이 넝쿨째(또는 덩굴째) 굴러떨어졌다'란 표현은 뜻밖에 좋은 물건을 얻거나 행운을 만났다는 말이다.

이런 속담을 쓸 때는 기왕이면 '호박이 넝쿨째 굴러떨어졌다'라고 하는 게 좋다.

함께 쓰는 단어이므로 '…덩굴째 굴러떨어졌다'라고 해도 틀린 것은 아니지만,속담은 관용적으로 굳어진 표현이기 때문에 이를 존중해 주는 게 바람직하다는 뜻이다.

'덤불'은 형태는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말이다.

이는 '어수선하게 엉클어진 수풀'을 가리킨다.

우리 속담에 '덤불이 커야 도깨비가 난다'란 말이 있는데 이는 '자기에게 덕망이 있어야 사람들이 따르게 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숲이 깊어야 도깨비가 나온다/물이 깊어야 고기가 모인다/산이 깊어야 범이 있다' 등도 모두 같은 뜻의 속담이다.

한국경제신문 기자 hymt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