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 버냉키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 국채 직접 매입이라는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앞으로 6개월 동안 3000억달러 규모의 장기물 국채를 사들이는 것을 비롯 모두 1조1500억달러의 돈을 풀겠다는 것이다. 중앙은행의 발권력을 동원해서라도 실세 금리 인하를 유도하고 경기회복을 부추기겠다는 뜻이다.

버냉키 의장은 '헬리콥터 벤'으로 불린다. 2002년 한 강연회에서 "디플레이션을 방지하기 위해선 헬리콥터로 공중에서 돈을 뿌리듯 적극적으로 통화를 공급할 필요가 있다"고 언급한 것이 그런 별명을 얻는 계기가 됐다. 이번의 국채 직매입 결정은 별명에 참으로 걸맞는다.

FRB가 발권력까지 동원하면서 본격적 양적완화 정책을 천명하고 나선 것은 미국 금융시장의 상황이 얼마나 어려운지,경기침체에 대한 우려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단적으로 드러내준다. 실제 구제금융을 투입해야 하는 분야만도 한두 곳이 아니다. 은행 부실자산처리,서브프라임 모기지업체 지원,자동차 빅3,보험사 등등 정부의 눈치만 살피는 업계가 줄줄이 늘어서 있다. 미 정부가 엊그제 민 · 관이 함께 참여하는 형태로 1조달러 규모의 은행 부실자산을 처리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했지만 계획이 순탄하게 실행된다 하더라도 은행 부실자산을 모두 처리하기엔 아직도 거리가 멀다.

게다가 경기회복이 요원하다는 점,부동산가격이 하락세를 이어갈 경우 추가부실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점 등을 감안하면 국채발행 수요는 여전히 많다. 따라서 이번의 3000억달러 국채 직매입은 헬리콥터에 시동을 건 데 불과하다고 봐야 한다. 앞으로 유사한 사례가 더 이어질 것이란 이야기다.

문제는 부작용이 만만치 않다는 점이다. FRB가 돈을 찍어내 풀게 되면 달러화 가치가 하락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금융위기로 인해 기축통화인 달러화 선호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장기적으로 이어지긴 쉽지 않은 셈이다. 실제 국제외환시장에서는 유로화 엔화 등 주요 통화의 가치가 상승하는 조짐이 관측되고 있는 게 사실이다.

미 정부가 발행하는 국채 가격이 약세를 보일 것 또한 예상하기 어렵지 않다. 미국 국채의 매력이 줄어들 경우 파장은 간단치 않다. 우선 외환보유 대국들이 미국 국채 매입을 기피하고 유전 광산 같은 실물자산이나 통화가치 상승이 예상되는 나라의 국채 매입 쪽으로 기울 가능성이 높다. 올해 미국 재정적자와 무역수지적자 합계가 2조달러를 훨씬 웃돌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이고 보면 해외로부터의 자금유입 감소는 미 정부의 경제운용에 큰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또한 달러화 약세는 원자재와 상품가격의 상승을 유발해 실물경제 회복의 걸림돌로 작용할 수도 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기축통화로서의 달러화 위상이 흔들릴 가능성이다. 실제 7000억달러 이상의 미국 국채를 보유한 중국의 저우샤오촨 인민은행장은 달러화 대신 국제통화기금(IMF)의 특별인출권(SDR)을 새 기축통화로 삼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물론 미국이 이를 받아들일 리 만무하고 유로 엔 위안화 같은 통화들이 달러화에 필적할 호적수가 된 것도 아니지만 달러 독주체제에 균열이 생기고 있는 것만은 의심하기 어렵다. 세계경제질서에 큰 혼란이 초래될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발권력까지 동원한 FRB의 양적완화 정책을 예사롭게 보아 넘길 수 없는 것은 그런 이유다.

이 같은 우려를 불식시키려면 긴밀한 국제공조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FRB식 양적완화정책에 회의적 반응을 보이는 유럽국 등이 미국과 공동보조를 취하기로 합의만 해도 달러 약세와 그로 인한 혼란은 크게 줄어들 게 분명하다. 하지만 나라마다 사정이 제각각이어서 낙관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라도 내달 초 열리는 G20정상회의를 관심깊게 지켜봐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