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일 미국 프로풋볼(NFL) 챔피언 결정전 '슈퍼볼' TV 중계를 지켜본 전 세계 2억여 시청자들은 도발적인 내용의 중간 광고를 지켜봤다. 현대자동차의 럭셔리 세단 '제네시스'가 도요타 렉서스와 벤츠 등을 제치고 올해 북미의 차로 선정됐다는 소식에 경쟁사 최고경영자들이 벌컥 화를 내는 내용이었다. '화난 보스'라는 내용의 이 광고는 자동차 본고장 미국 시장에서 질주하는 현대차의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줬다.

뉴저지주 버겐카운티 마화시 17번 고속도로선상에 있는 자동차대리점 리버티현대.이곳의 마이클 디실바 매니저는 요즘 신바람이 났다. "1,2월 중 제네시스 11대를 포함해 총 110대의 자동차를 팔았습니다. 작년 같은 기간에 비해 판매가 60%가량 증가했습니다. " 6년 전 현대차 딜러숍을 연 이 대리점은 세계 자동차 시장 불황의 '열외 지대'다.

금융위기 직격탄을 맞아 얼어붙은 미국 자동차 시장에서 현대차와 기아자동차의 약진은 곳곳에서 화제를 낳고 있다. 올 들어 2월 말까지 미국 전체 자동차 판매는 134만대로 39.3% 곤두박질쳤는데 현대차는 이 기간 중 5만5133대를 팔아 작년 동기 대비 4.9%의 판매 신장률을 기록했다. 기아차도 4만4169대를 팔아 1.9%의 증가세를 나타냈다.

당연히 시장 점유율이 껑충 뛰었다. 지난해 5.1%에 불과했던 두 회사의 미국 시장 내 합계 점유율이 올 들어 7.4%(현대차 4.1%,기아차 3.3%)로 수직상승했다. 현대차가 연간 기준으로 미국 시장 점유율을 2%(2001년)에서 3%(2008년)로 1%포인트 끌어올리는 데 7년이 걸린 점에 비춰 본다면 말 그대로 경이적인 질주다.

현대 · 기아차가 불황을 뚫고 미국 시장에서 선전을 거듭하는 요인은 뭘까. 조엘 에워닉 현대차 북미법인(HMA) 부사장은 "시장 점유율은 전쟁"이라며 "전쟁에서 이겨야 하기 때문에 현대차는 불황기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공격적으로 마케팅을 하고 있다"는 답을 내놓았다. 그는 "0.1%포인트의 시장 점유율을 끌어올리기 위해 무슨 노력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느라 HMA 임직원들이 잠을 자지 못할 정도"라고 말했다.

그 결과 중 하나가 자동차를 산 뒤 1년 내에 실직하면 차를 되사주는 '어슈어런스(assurance)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은 불황에 잔뜩 짓눌려 마케팅에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던 GM 등 미국 빅3는 물론 도요타 벤츠 BMW 등 선발 경쟁회사들의 허를 찌른 승부수였다.

현대 · 기아차의 공격적인 마케팅은 원화가치 약세로 인한 가격 경쟁력 향상이 적지 않게 뒷받침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베르나와 쏘나타 등은 연초 환율 효과를 살려 미국 시장에서 가격 인하를 단행,현대차의 점유율 확대를 주도했다. 그러나 탄탄한 품질이 받쳐주지 않는다면 환율 효과는 무용지물일 수밖에 없다.

199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현대차의 간판 수출 차종이던 '엑셀'이 대당 5000달러도 안 되는 싼 가격 덕분에 잠시 돌풍을 일으켰다가 잦은 잔고장으로 인해 이내 애물단지로 전락했던 게 단적인 예다. 현대차 품질 전반에 대한 소비자 불신을 걷잡을 수 없이 확산시키기까지 했다. 에워닉 부사장은 "당시 현대차 브랜드 이미지는 한없이 추락했고,TV 토크쇼에서 단골 우스갯거리로 등장할 만큼 상황이 심각했다"고 회고했다.

그런 위기를 돌파한 것이 '품질 경영'이다. 글로벌 메이커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시장의 신뢰를 얻을 수 있는 품질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판단 아래 현대 · 기아차는 곧바로 통합 품질본부와 연구개발본부를 발족시켜 품질 확보에 사활을 걸기 시작했다. 미국 시장에서 당시로는 파격적인 '10년 10만마일 보증 프로그램'을 도입하는 승부수를 던져 대성공을 거두면서 품질과 브랜드 이미지를 정상화시키는 대역전극을 일궈냈다.

어슈어런스 프로그램 등 과감한 마케팅 공세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이런 피나는 품질 경영 노력이 앞서줬기에 가능했다는 게 미국 자동차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현대 · 기아차가 내구품질조사에서 크라이슬러와 닛산,폭스바겐 등 내로라하는 선발 주자들보다 훨씬 높은 평가를 받았다는 미국 시장조사기관 JD파워의 최근 발표는 현대 · 기아차의 선전이 일시적 이변에 그치지 않을 것임을 뒷받침해준다.

존 크래프칙 현대차 미국법인 사장은 "우리의 진짜 도전은 이제부터"라고 말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별볼일 없던 도요타가 렉서스 출시 등 품질과 마케팅에서 각고의 노력을 펼쳐 1등이 되기까지 거쳐간 길을 뒤따르는 수준에서 벗어나 이제는 스스로의 힘으로 글로벌 시장 판도를 주도할 수 있는 '톱3' 반열에 들어야 한다는 얘기다.

기아차도 연산 30만대 규모의 조지아 공장을 당초 일정대로 건설해 올 12월 양산에 들어가기로 했다. 쏘렌토 후속 모델 등 2~3개 차종을 투입,라인업을 크게 강화하기로 했다.

미국 등 주요 시장에서 현대 · 기아차의 도약이 언론에 연일 나오면서 도요타 벤츠 등 최강자들과 모든 전선에서의 본격 경쟁도 불가피해졌다. 더구나 현대 · 기아차와 도요타는 생산차종 라인업은 물론 해외 생산공장,주력 판매시장 등 거의 모든 부문에서 겹친다.

모처럼 잡은 승기를 살려 브랜드 이미지를 더욱 끌어올리고 글로벌 매니지먼트 능력을 한층 업그레이드하는 등의 과제가 남아 있다는 얘기다.

◆ 특별취재팀

유근석 산업부 차장(팀장),이익원 뉴욕 특파원,조주현 베이징 특파원,

차병석 도쿄 특파원,김홍열 워싱턴 특파원,송형석 · 박동휘 · 김미희

산업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