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의 나라' 인도로 가는 길은 멀었다. 오전에 인천공항을 떠나 태국 방콕을 경유해 인도의 수도 델리에 도착하니 자정을 넘었다. 다음날 이른 아침부터 기차와 버스를 갈아타고 첫 순례지인 북인도 비하르주의 시라바스티(사위성)에 도착하니 벌써 저녁 무렵.순례를 시작하기도 전에 이틀이 가버렸다. 대한불교조계종이 주관한 인도 · 네팔 불교성지 순례단에 동참해 불교의 8대 성지를 찾아가는 첫날.붓다의 일대기를 따라 움직이려면 동선이 복잡하고 시간도 많이 걸리는 탓에 델리에서 기차를 타고 럭나우역에 내린 다음 가장 가까운 시라바스티(기원정사)로 향했다.

금강경 설법지, 시라바스티

신라의 옛이름인 '서라벌'의 어원이 됐다는 시라바스티는 석가모니가 24안거를 지내면서 '금강경''원각경''능엄경' 등 현재 전하는 경전의 3분의 2 가량을 설한 곳이다. 안거란 우기 동안 한 곳에 머무르며 수행하는 것으로 당시 인도에는 우안거(雨安居)만 있었으므로 붓다는 평생에 걸쳐 24년 동안 이곳 기원정사에서 안거를 지냈다.

아침 일찍 기원정사에 도착하자 땟국물이 졸졸 흐르는 아이들이 먼저 환영한다. "텐 루피! 원 달러!" 동정심을 억누르며 기원정사로 들어서니 드넓은 잔디밭과 울창한 숲이 잘 정비된 모습이다. 하지만 온전한 형태의 건물은 없고 기초만 남은 유적들뿐이다.

석가모니의 아들인 라훌라 기념탑(스투파)과 아난존자가 보드가야에서 묘목을 옮겨 심었다는 아난다 보리수,수닷타 장자가 세운 최초의 승원터인 코삼비쿠티와 경행터를 지나자 기원정사의 중심 유적인 향전(香殿 · 간다쿠디)이 나온다. 향전은 붓다가 제자들에게 경전을 설했던 현장으로 대승불교의 핵심 경전인 '금강경'도 여기서 탄생했다.

붉은 벽돌로 높다랗게 단을 쌓고 그 위에 사각형으로 만든 향실에는 붉은 꽃,노란 꽃이 빼곡히 뿌려져 꽃비라도 내린 듯하다. 한국 버마 태국 등에서 찾아온 스님과 신도 등의 순례자들은 이 향실을 향해 절을 하거나 경전을 독송한다. 조용히 명상에 잠긴 순례자들도 있다.

순례단장인 조계종 총무원 기획실장 장적 스님과 조계사 부주지 토진 스님 등 순례단은 이곳에서 '표준 금강경' 봉헌법회를 열었다. 크고 작은 차이와 오역을 안은 채 제각각이었던 '금강경' 한글본을 여러 전문가의 오랜 연구와 토론 끝에 표준 번역본을 만들었고 이를 그 설법지에서 봉헌하는 자리였다.


붓다가 탄생한 룸비니와 열반지 쿠시나가르

기원정사에서 국경을 넘어 동북쪽으로 40분가량 가니 네팔 영토 안에 붓다의 탄생지 룸비니가 있다.

싯다르타의 어머니 마야 부인은 아기를 낳으러 친정으로 가는 길에 산통을 느껴 이곳 룸비니 동산의 무우수 가지를 잡고 출산했다고 한다.

룸비니에는 싯다르타가 태어난 장소의 발굴 현장을 그대로 사원으로 만든 마야데비사원,마야 부인이 목욕을 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원 앞 연못,그리고 이곳이 붓다의 탄생지임을 기록한 아쇼카 석주 등이 순례자들을 맞고 있다. 사원 내에는 아기 부처의 족적과 붓다의 탄생 모습을 새긴 부조가 있고,아쇼카 석주 앞에는 절을 하거나 기도를 하는 순례자들로 늘 북적댄다.

다시 국경을 넘어 남쪽으로 향하면 붓다의 열반지인 쿠시나가르에 도착한다. 붓다는 쿠시나가르 동남쪽 바이샬리의 벨루바 마을에서 마지막 안거를 시작하면서 제자 아난다에게 석 달 후 쿠시나가르의 사라나무 두 그루 사이에서 열반에 들 것이라고 예고한다. "내 나이는 80에 들어 썩은 수레와 같으니…너는 네 자신과 법을 등불로 삼아라."

늙고 병든 몸으로 사라쌍수(雙樹) 아래에 도착한 붓다는 "비구들이여,모든 현상은 변천한다. 게으름 없이 정진하라"는 말을 남기고 열반에 들었다. 붓다의 열반지에는 열반사가 세워져 있는데 태국 미얀마 일본 한국 등 세계 각국에서 온 스님과 신자들의 순례 행렬이 끊이지 않는다.

열반사 안에는 오른 팔로 머리를 괴고 옆으로 누운 열반상이 모셔져 있다. 6.1m 크기의 이 열반상은 5세기께 조성된 것으로 19세기 중반 심하게 파손된 상태로 발굴된 것을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열반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붓다의 몸을 화장한 다비장터가 있는데 둥근 언덕 모양의 라마바르 스투파가 세워져 있다. 붓다의 몸에서 나온 수많은 사리는 인근 8개 나라에 분배돼 붓다의 가르침과 함께 퍼져 나갔다.


붓다가 깨달음 이룬 보드가야

쿠시나가르에서 남서쪽으로 내려가면 한문경전에 '비사리'로 기록된 바이샬리에 당도한다. 바이샬리는 붓다시대에 북인도 일대의 교통ㆍ문화ㆍ경제 중심지였고 불교와 인연이 매우 깊은 곳이다. 바이샬리는 일일이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로 붓다의 숨결이 밴 곳이지만 현재까지 확인된 유적은 많지 않다. 체계적 발굴이 이뤄지지 않은 탓이다.

기원전 250년께 아쇼카왕이 붓다의 사리를 봉안한 제1스투파와 가장 완벽한 형태로 남아있는 아쇼카 석주(돌기둥),붓다의 유골이 아닌 유회(遺灰ㆍ재)를 모신 제2스투파 등이 옛일을 증언한다. 제1스투파 옆에는 원숭이들이 붓다를 위해 팠다는 '원숭이연못'이 있고,스투파와 연못 주위에는 기단부만 남은 유적들이 옛 사원의 거대한 규모를 가늠케 한다.

다시 남동쪽으로 길을 재촉한다. 비하르주의 수도 파트나를 지나 5세기에 세워진 최초ㆍ최대의 나란다 불교대학과 라지기르(왕사성)의 첫 불교사원인 죽림정사,영산회상의 설법지가 있는 영취산에 들렀다가 붓다가 깨달음을 완성한 성도(成道)의 현장 보드가야에 도착했다. 기원전 250년께 아쇼카왕이 세운 마하보디사원(대보리사)은 태국 스리랑카 미얀마 티베트 한국 일본 등 각국에서 온 순례자들로 만원이다. 높이 52m의 거대한 탑처럼 생긴 사원 안에서 독경,기도,오체투지,좌선,명상,행선 등을 하는 사람들의 표정이 참으로 고요하다.

사원의 왼쪽 옆에는 높이 25m의 보리수가 서 있다. 이 나무의 원래 이름은 피팔나무인데 붓다가 그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깨달음의 나무',즉 보리수라 부르게 됐다고 한다. 높은 보호용 철책을 둘러친 보리수 나무 한쪽 옆에는 붓다의 커다란 발자국을 새긴 족적이 있고,그 반대편에는 붓다가 깨달음을 얻었던 자리인 '금강좌'가 황금색 천으로 덮여 있다. 보리수 주변에는 예불을 드리고 독경하는 불교신자들로 성시를 이루고 있다.


최초 설법지 사르나트

보드가야에서 서북쪽으로 향하면 갠지스강이 흐르는 바라나시를 지나 붓다가 처음 법을 설한 사르나트(녹야원)에 당도한다. 깨달음을 완성한 붓다는 보드가야에서 약 300㎞를 걸어 바라나시 북쪽의 '사슴동산'으로 불리던 녹야원에 도착,다섯 제자에게 최초의 법을 설했다.

붓다는 제자들에게 쾌락과 지나친 고행이라는 두 개의 극단에 빠지지 말고 중도(中途)의 길을 가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 고ㆍ집ㆍ멸ㆍ도의 사성제(四聖諦)와 팔정도(八正道)를 제시했다. 그 가르침의 현장에는 '진리를 보는 탑'이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어에서 이름이 유래한 다메크 스투파가 거대한 기둥처럼 서 있고,부러진 아쇼카 석주와 기단만 남은 다르마라지카 스투파,사원 및 승원터가 넓게 퍼져 있다.

붓다가 처음 법을 설한 지 2500여년.열반을 앞둔 붓다가 "법에 의지하라"고 한 대로 법은 영원한데 형상으로 있던 것은 모두 변했다. 대보리사를 빼면 가는 곳마다 터만 남은 인도의 불교 유적들은 그 자체가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진리를 전해준다. 그래서 붓다는 금강경에서 "무릇 모양이 있는 모든 것은 허망하니 모든 형상이 형상 아님을 본다면 곧 여래를 보리라"고 하지 않았던가.

바라나시(인도)=글 · 사진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