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기자로 일하던 시절 매년 한두 차례 편지를 받았다. 한글 관련 단체에서 보낸 외래어와 외국어 표현 자제 요청이었다. 그런 당부가 아니라도 되도록 우리말을 쓰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패션 용어 자체가 대부분 외국어인 데다 전문가 조언 또한 한글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엘레강스하고 판타스틱하고 쉬크하다는 것 등이 그것이다. 토씨 외엔 거의 몽땅 다른 나라 말로 이뤄진 자료를 보면서 어떻게든 우리말로 풀어 쓰려 끙끙대다 보면 속이 상하다 못해 화가 나곤 했었다. 수사(修辭)에서 한글을 찾기 힘든 건 비단 패션 부문에 그치지 않는다.

'명품 라이프 케어 서비스''희망의 컬러 에너지' '컬러테라피 인테리어 팁''스타일리시한 음식…캐주얼한 다이닝'.'그린 컬러의 오거닉 실크 침장'.한 걸음 더 나아가 '글리터리한 슈즈를 함께 매치한다면'에 이르면 도대체 어느 나라 사람이 써낸 건지 의심스럽다.

곳곳에서 무슨 말인지 모를 국적 불명 문구를 남발하니 딱히 어디가 더 심하다고 꼬집기도 어렵다. 아무리 업계 관행처럼 여겨진다 해도 이대로는 도저히 안되겠다 싶었을까. 현대백화점이 매년 3월 9일을 자체 한글날로 지정,정기 점검과 직원 캠페인을 병행하기로 했다는 소식이다.

과도한 외래어 사용을 지양하고 정확하고 이해하기 쉬운 우리말로 고객에게 올바른 정보를 전달하겠다는 것이다. 사전에 자체 광고물을 골라 '국어문화운동본부'에 점검을 의뢰했더니 13개 분야 150여건의 오용 사례가 나왔다고 한다. '머니 베스트 아이템' '모피 베스트브랜드 특가상품 랠리' 등.

광고나 홍보 문안을 작성하는 이들의 고민도 결코 작지 않을 것이다. 짧지만 강렬한 수사,고객의 마음과 지갑을 열 수 있는 수사를 생각해내기 위해 밤낮으로 고심할 것도 틀림없다. 그러나 뭐든 너무 흔하면 그 힘을 잃는 법.빅,그랜드,베스트는 더이상 원래 뜻으로 전달되지 못한다.

포장과 구호는 중요하지만 알맹이 없는 포장,사실과 다른 구호는 사람을 끌어당기기는커녕 자칫 배신감만 갖게 하기 십상이다. 말이 되든 안되든 그럴싸한 외국어를 이어 붙인다고 '있어 보이는' 것도 아니다. 언어는 의식뿐만 아니라 무의식에도 작용한다. 백화점 한글날 제정이 선언적 행사에 그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박성희 수석논설위원 psh77@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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