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기야 사법부마저 논란에 휩쓸리고 있다. 신영철 대법관의 '촛불재판 개입' 의혹은 우리 사회 최고의 신뢰시스템을 위기에 빠뜨렸다. 대법원의 자체 조사 결과가 나오지 않아 사건의 진상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대법원장의 이름까지 거론되는 걸 보면 문제가 여간 심각한 것 같지 않다.

신 대법관이 지난해 서울중앙지법원장 시절 소속 판사들에게 친전 이메일을 보내 촛불집회 관련사건의 재판을 재촉하는 등 법관과 재판의 독립을 침해했다는 의혹이 언론을 통해 표면화된 것은 최근 일이다. 그러나 실은 훨씬 전에 재판개입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빚어졌다는 것이 사실로 드러났다. 얼핏 세대가 다른 고위법관과 소장 판사들 사이의 갈등처럼 보이기도 했고,대법관 임명을 위한 출세지향적 처신의 부산물이라는 의심까지 제기됐지만,문제의 본질은 우리나라 헌법이 금과옥조로 삼아온 사법권 독립에 대한 침해여부에 있다는 것이 중론이다.

많은 이들이 근무평정권 및 사건배당권을 가진 법원장이 특정 사건에 대해 수차례 처리 방향을 암시하는 이메일을 보낸다면 그 어느 판사가 부담감을 느끼지 않겠는가라고 반문한다. 물론 정반대의 목소리도 나온다. 법원행정을 맡은 법원장으로서 그 정도의 의견을 전달하는 게 그렇게 큰 문제냐,법원장의 언행으로부터 영향을 받을 판사가 극소수고,'그 정도 발언에 영향을 받는다면 판사라고 할 수 있느냐'는 주장이다. 청와대 관계자가 사법부에서 판단할 일이라는 원론적 입장을 표명하면서도 '행정적으로 재판을 빨리 처리하라는 것은 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말했다는데 결국 안 하느니보다 못한 말이 되고 말았다.

대법원은 문제의 심각성을 감안해 즉각 '철저한 진상 규명'을 다짐했지만,그 결과와는 상관없이 문제를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이슈로 축소 · 상대화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는 인상을 준다. 그러니 사법부마저 참담한 신뢰의 위기 논란에 빠진 것이다.

2300여명 판사들의 인사권,헌법재판관 3분의 1과 중앙선거관리위원 3분의 1 지명권 등 대법원장의 제왕적 권한을 문제 삼기도 하고 사법행정권의 비대화,고질적인 법원관료주의,법관사회에 만연된 연공서열을 꼬집기도 하지만,정작 핵심은 신뢰 문제다.

사법권의 독립,특히 이번에 문제된 재판의 독립과 법관의 독립은 사법에 대한 신뢰의 전제조건이자 거점이다. 사법의 최고단계인 대법원이 이를 지켜 주지 못하면 사법에 대한 신뢰 또한 허물어지고 만다. 행정부는 국민과의 소통을 소홀히 하다 신뢰를 잃고,입법부는 의회폭력으로 신뢰를 내팽개쳤는데,이젠 사법부마저 신뢰의 논란에 휩싸이고 말았다.

쉽진 않겠지만 해결책이 필요하다. 차제에 개헌이나 관계법 개정을 통해 대법원장의 법관인사권,사법행정권 등을 대폭 축소하고 법관 및 재판 독립을 위한 특별기구를 설치하는 등 사법의 독립을 더욱 강화시켜 주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그러나 제도개혁 못지않게 중요한 일은 의식과 관행을 바꾸는 것이다.

그동안 법원의 아름다운 전통으로 계승돼 온 서열주의 관료적 조직문화를 명실상부 사법권 독립이라는 헌법정신에 맞게 뜯어 고쳐야 한다. 대법원 자체조사로 일을 무마할 수 있으리라는 섣부른 기대는 금물이다. 젊은 판사들이 선배법관을 존경하는 것은 법원관료주의에 대한 순응과는 무관하다.

틈만 나면 사법의 독립을 강조하다가도 후배법관들이 알아서 따라오기를 기대하는 선배들의 이중 잣대는 이제 더 이상 미덕이 아니다.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해 그동안 법원의 조직과 운영에서 법관과 재판의 독립에 반하는 위헌적 관행이나 구습들이 영향을 미치지 않았는지를 냉철하게 조사,반성하고 진지하게 해결방안을 찾아야 한다. 사법개혁,이제 '시즌 2'로 가야 할 시점이다.